한 여자가 웃으며 걷고 있다. 마주하는 얼굴이라 잠시 당황한다. 그러나 나를 향한 웃음은 아니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그녀의 웃음은 혼자만의 것이었다. 그것을 확인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즐거운 일이 있기에 저렇게 길을 걸으면서도 활짝 웃고 있는 것일까. 물론 웃는 모습은 싫지 않았다. 잔뜩 찡그린 얼굴들이 많은 세상에 웃음은 오히려 신선했다. 그러나 그 뿐, 우리는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녀도, 그녀의 웃음도 금방 잊었다. 그러나 웃음과는 달리 눈물은 그렇게 쉽게 스쳐지지도 잊혀지지도 않는다. 내내 마음의 발을 붙든다. 제대로 눈빛 한번 맞추지 않은 사람의 눈물이라 하더라도 절로 이끌려간다. 눈물에게로…….

한때, 눈물은 나의 것이었다. 참으려 애쓸 수도 없을 만큼 눈물은 속수무책이었다. 머리가 그만두라고 명령해도 가슴은 듣지 못했다. 먹먹한 슬픔에 가슴은 귀먹고 눈멀었다. 슬픔은 눈물을 타고 흘러 내렸지만 그만큼 다시 샘솟았다.
순식간에 닥친 고통은 참으로 벅찬 것이었다. 고통 앞에서 제대로 맞서 보지도 못한 채 꺾일 수 있음을 그 때 알았다. 그러나 홀로 내쳐진 것은 아니었다. 절망의 끝에 가보니 내미는 손은 참으로 많았다. 신앙인이기에 주님의 손을 먼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선한 사람들의 인정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 주님의 손은 든든했고 인정의 손은 따스했다. 덥석 손을 붙들었다. 그렇게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던 상황에서 나는 내미는 손들의 힘으로 인해 간신히 빛을 찾았다.

나는 고통과 맞서지 않고 순명했다. 그것이 나를 평화롭게 해주었다. 절망은 바닥이다. 바닥에 엎드려 고통과 마주 싸우는 대신 벌렁 드러누워 온 몸을 고통에 맡겼다. 그리고 고통과 하나가 되었다. 팔 벌리고 껴안을 듯 누운 자세에서 나는 캄캄한 바닥 대신 눈부신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하늘은 내게로 왔고 그것은 평화였다.
고통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아프게 겪어 본 사람은 그 내용이 다르다 할지라도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힘을 갖게 된다. 또한 고통이 주는 선물이 무엇인지도 깨닫게 된다. 고통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게 하고 소소한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 준다. 나는 고통을 통해 그렇게 큰 은혜를 경험했다.

그 때문인지 슬픔에 가득 찬 얼굴을 한 사람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용기가 나지 않아 머뭇거릴 뿐이지만 마음은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눈물을 닦고 슬픔을 어루만진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 말 없이 그저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 울지 마세요. 슬퍼 마세요. 그 눈물이 당신을 강하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 줄 것입니다. 손의 온기로 그렇게 전하고 싶다. 더 할 수만 있다면 한번 꼭 껴안고도 싶다. 고통 중에 있을 때 나는 참으로 외로웠기 때문이다. 온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도움을 주는 손이 아닌, 도움을 청하는 손길이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나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게 전화를 했다. 갈라지는 음성으로 보아 그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내었는지 짐작이 갔다. 처음 알게 된 사이임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는 아무런 경계 없이 자신의 아픔을 다 드러낸다. 그녀는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그녀는 자식문제로 인해 앞을 헤아릴 수 없는 깜깜한 터널로 접어들었다. 1년 전, 나도 그녀와 꼭 같은 고통을 경험했다. 아이의 처절한 사춘기를 지켜보며 한없는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아이는 친구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인해 받은 상처를 왕따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였고 그 때문에 세상을 피하려 하며 자기 속으로만 숨어들었다. 단 한번의 결석도 없던 아이가 갑자기 등교거부를 하며 얼음처럼 차가워졌을 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어떤 말로도 어떤 지식으로도 닫힌 아이의 마음을 열진 못했다. 인내하며 기다렸지만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암흑이었다.
엄마라는 자리에서 받는 고통은 다른 어떤 고통보다 더 절절하다. 엄마라는 자리는 아이의 고통을 보면 깊은 슬픔에 젖어드는 자리이다. 슬픔에 적셔져 금세 찢어지는 자리이다. 찢어지면서도 꾸깃꾸깃 다시 자신을 기워내야 하는 가슴은 어느새 너덜거리는 누더기가 되고 말지만 그러면서도 끝끝내 아이를 지켜내야 하는 고독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식의 일이라 쉽게 드러내 놓지도 못한 채 아픔을 삭여야 한다.

1년 전 힘들어하던 내게 많은 이들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은 없다. 다만, 내가 고통에 적응하게 되고 받아들일 현실에 대해 겸손한 마음이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내게 닥친 어려움을 받아들이게 되자 조금씩 길이 보였다. 자연 속에서 경쟁보다는 함께 하는 공동체의식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는 그런 대안학교를 찾게 되었다. 다행히 아이는 여러 힘든 과정들을 극복하면서 적응해 나갔다.

그러나 나의 아이와 그녀의 아이가 똑같은 상황에 부딪힌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아이도 학교를 거부했지만 원인은 우리 아이와 달랐다. 그 아이는 외부적인 문제가 아닌, 자신 속의 세계에 갇혀 학교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음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그녀를 위로했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사실, 나 또한 아직 고통의 터널을 다 지나왔다고 말하기엔 이른 감이 있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고 불안한 마음이다.

그녀가 말했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짐작조차 못했노라고……. 나 또한 그랬었다. 그런 일을 겪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줄 알았다. 결손 가정이거나 아니면 다른 여러 문제들이 많은 부모들의 아이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세상에 미리 준비되거나 정해진 고통은 없고 우리는 언제나 그 고통 앞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다는 것을, 그래서 너의 아픔이 언제든 내 것이 될 수도 있고 내 아픔 또한 언제든 너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고통을 당해도 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것도 깨달았다. 그동안 얼마나 겸손하지 못한 마음으로 살아 왔었는지도 아프게 배웠다.
그것을 알고 있는 한, 아픔을 겪고 있는 그 누구로부터도 나는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서로에게 기꺼이 손 내밀고 다가서야 하는 것이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운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마음이 된 그녀에게 정말 힘이 되어주고 싶다. 그녀 또한 이번 일을 겪고 나면 세상을 예전과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들에 대한 감사를 알게 될 것이고 나를 힘들게 만드는 헛된 욕심들로부터도 한 발 물러나는 자유를 찾게 될 것이다.

달디 단 참 평화는 고통 뒤에 온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될 어느 날, 다시 한번 그녀와 만나고 싶다. 누더기 가슴이 오히려 더 강해졌음을 서로에게서 아름답게 확인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