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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리고 친구


BY 선물 2005-06-21

길거리에서 뛰어노는 두 아이를 만났다.
한 쪽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두 아이는 참으로 많이 닮아서 형제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잠시 웃음이 나왔다.
'참 신기도 하지, 같은 핏줄이라고 어쩜 저리도 빼 박은 듯이 닮았을까.'
그 중에 형이 되는 아이를 나는 알고 있다. 내게 수학을 배우는데 퍽 똘똘하고 귀여운 아이다. 그렇잖아도 워낙 아이들을 예뻐하는 성격이라 자꾸만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말을 붙이게 된다.
"네 동생이 너랑 정말 닮았더라. 참 귀엽던데 네가 형이니까 잘 보살펴줘야겠다."
아이의 엄마는 몸이 불편해서 현재 아이들을 직접 돌보지 못하고 있다. 대신 할머니께서 아이들을 돌보시는데 아주 밝고 건강하게 키우신다.
내 질문에 아이는 똘망똘망한 눈빛을 하고서는 이렇게 답한다.
"하나도 귀엽지 않아요. 날 얼마나 괴롭히는데요. 제 친구들하고도 막 싸우고 그래요."
형 친구들과 싸운다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럼 넌 동생 편을 들어야겠네!"
"아뇨! 전 친구들 편을 들어요. 오히려 동생이 친구들을 이기기도 하는 걸요."
아이의 대답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억 저 쪽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던 과거의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미끄러지듯 기억은 나의 국민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한 친구가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에 굵게 웨이브를 넣은 퍼머를 하고 반짝거리는 금테 안경을 썼던 아이.
하얗고 길다란 손가락으로 음악 시간에 풍금을 치며 반주를 넣던 그 친구는 내게 정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만 해도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는 드물었는데 이 친구는 언제나 큰 대회에 나가 수상을 했고 거기에다 공부까지 뛰어나게 잘 했었다.
나는 때로 친해지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친구가 있는데 이 친구에게 그런 마음이 들었다.
워낙 나와는 다른 부류의 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부럽기는 했으나 정작 친해질 엄두는 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 친구가 어느 날 먼저 내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나와 친해지고 싶었다며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고 싶다고 하였다

그렇게 따라간 친구의 집은 정말 으리으리하였다.
넓은 정원이 딸린 삼층 집. 그 멋진 초록 정원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정원사가 있었던가, 정말 잘 가꾸어진 정원이 어린 마음에도 근사해보였다.
친구의 방은 이층에 있었다.
붉은 카펫이 딸린 계단을 올라가는데 나는 괜히 이 친구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주눅이 들어 도무지 편안한 마음이 되질 못했던 것이다.
친구의 방에 있던 반짝거리는 검정색 그랜드 피아노도 나를 기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날 친구의 집에서 무얼하고 놀았는지 기억에 없다.
그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날 이후로 우리는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 친구가 내 옆에 와서 밥도 같이 먹고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나도 너희 집에 놀러가고싶어."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오고 싶다는 말이 난 무척 좋았다.
그 때가 5학년 때였는데 우리 집이 그 친구 집처럼 부자가 아니란 사실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정도의 성숙함이 내게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몇 몇 친구와 함께 그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왔다.
우리는 엄마가 준비해 주신 과자도 먹고 골목에 나가서 재미있게 뛰어놀기도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몇 명씩 따로 떨어져서 놀았는데 얼마 뒤 내 남동생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을 울린 것은 그 친구였다. 동생은 큰누나인 나를 무척 좋아해서 내 친구들과 함께 놀려고 했지만 아마 친구들이 끼워주질 않았었던 것 같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섯 살 아래의 막내 동생을 그 친구가 떠밀었고 동생은 억울한 마음에 지지않으려 애쓰며 나름대로 그 친구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동생을 떠미는 친구의 모습은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친구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귀여운 내 동생에게만 소리지르고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 때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던 것 같다. 내 동생. 내 귀여운 동생을 밀고 울리는 친구에게 화를 내지 못하는 비겁한 내가 미워 울고 누나 맘도 몰라주고 이런 상황을 만든 동생이 야속해서 또 울고...

그 후로 그 친구와는 멀어졌다. 친구는 더 이상 나의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만만한 친구들이 훨씬 좋았다.
그리고 친구보다는 동생이 우선이었다.
비록 친구의 편을 들긴 했지만 내 마음은 확실히 가족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가끔 딸아이가 친구들에게는 자기가 아끼는 것을 빌려주기도 하고 또 상냥하게 대하면서도 동생에게는 뭐 하나 양보하려하지 않고 또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을 볼 때가 많다.
내 아이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아이들에겐 그런 성향이 많아보인다.

나는 맏딸이라 그런지 두 동생들에게 엄마 같은 마음을 가질 때가 많았었는데...
길을 가다가도 동생친구들은 군것질을 하고 있는데 내 동생이 못 먹고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정말 가슴아파하고 속상해했는데...
풍요롭지 못한 예전이 오히려 가족 간의 결속력은 더 단단하게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긴, 요즘은 가족이기주의가 더 문제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왜 예전과 같은 훈훈간 가족간의 정은 덜 느껴지는 걸까.
어떻게 보면 가족이기주의는 지금의 부모 세대가 만들고 있을 뿐 실상 아이들은 개인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집안 일이 있어 여러 형제가 모이면 옛날 일들을 추억하고 그리움이라는 한 마음으로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는 마음이 생겨난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그런 가족 행사라는 것이 있을지 또 모이면 몇 명이 모일지 참 안타깝다.
형제가 없으면 친구라도 확실한 관계를 맺어야 덜 외롭고 소외되지 않고 나의 편이 있음을 든든하게 생각할 수 있을 텐데...
워낙 세상이 급속도로 변해가니 그것도 알 수 없긴 하다.
저출산이 문제라고 하는데 내가 노인이 되었을 그 미래의 시간에는 참으로 고독한 사람들이 고독하게 살아갈 것 같다.
휑한 바람이 부는 세상.
왠지 나는 미리 서글프다.

아이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할 것 같다.
너와 내가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삶에서 자연스레 배워야 할 텐데...
그리고 정말 가족의 의미를 소중하게 새길 줄 아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진정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할 줄도 알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