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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보이시나요?


BY 선물 2004-09-03

눈이 시리다는 표현이 정말 한치의 보탬도, 덜함도 없이 꼭 들어맞는 그런 하늘을 얼마 전 보게 되었다. 제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라 할지라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옮기기엔 턱없이 부족하련만 그래도 그 순간 내 입에선 그림 같다는 표현이 절로 나왔다. 찬란한 쪽빛 하늘과 솜사탕처럼 탐스럽고 달콤한 구름. 눈으로 들이킨 푸름이 가슴까지 상큼하게 스며들었다.

하늘을 보며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그 시각 곁에는 아들이 있었다. 내 눈길을 따라갔던 것일까, 아이의 입에서도 우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서 봤다면 참으로 안타까웠을 것이다. 아이도 그런 마음이었는지 사진기가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며 나름대로 그 순간의 하늘을 계속 욕심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 본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아이와 함께 저녁 미사를 드리는데 강론하시는 신부님께서도 그 날의 하늘을 언급하셨다. 오늘 낮에 하늘을 보셨나요... 자칫하면 내 입에서 저요, 저요 하는 대답이 밖으로 터져 나올 뻔했다. 누군가 공감하며 그 시각 함께 하늘을 보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반가웠던 탓이다.

고개만 들면 머리 위로 언제나 펼쳐져 있는 드넓은 창공. 하지만, 의외로 하늘 한 번 눈에 담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은 듯하다. 아니, 어쩜 눈으로는 보았으나 가슴이 느끼질 못해 정말 보지 못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나처럼 펼쳐져 있는 하늘이지만 그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기까지는 먼저 내 마음이 평화로운 하늘을 닮아 있어야 했던 것도 같다.

수개월간 힘든 일을 겪었다. 그 때문일까, 통 하늘을 올려다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젠가 사람이 너무나 큰 고통을 만나면 더 이상 세상은 예전의 세상이 아닐 것이라고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재잘대는 새 소리도 들을 수 없고, 귀여운 콧망울 방실거리는 꽃들의 속삭임도 느낄 수 없고 눈부신 하늘의 찬란함도 볼 수 없어 세상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으리란 그런 내용의 글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그런 세상의 변화가 온 것이다.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세상, 모든 것이 정지되어 느끼는 것이라곤 고통뿐인 암흑 같은 세상. 그저 그러려니 막연하게 생각했던 세상이 내게 덥석 찾아왔던 것이다. 그것은 평화와의 단절이었다.

나는 언제나 평화를 원했었다. 글을 쓸 때나, 기도 드릴 때 가장 간절히 염원했던 것이 평화였다. 늘 평화를 주십사며 신에게 졸라댔다. 그러나 신이 주신 것은 고통이었다. 고통이 너무 아파 감히 신을 원망조차 할 수 없었다. 원망하면 더 심한 고통이 올까봐 나는 신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막상 그렇게 고통을 겪고 보니 예전에 내가 평화를 간절히 원했던 그 시간의 삶이 실상은 얼마나 평화로웠던 시간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신은 평화를 주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일 지혜가 모자랐던 탓에 어리석은 나는 계속 어둠 속에서 평화를 간청하는 못된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은 밝은 지혜를 주시고자 내게 고통을 선물하신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나는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감사함을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늘 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 속에 진정한 평화는 깃들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아픈 고통을 겪지 않았다면 나는 평화조차 고통으로 만들고 마는 어리석음을 계속 범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다 보면 생각보다 힘들다는 대답을 많이 듣게 된다. 최근의 나는 생명과 관련된 절박한 아픔이 아니면 그 고통에 감사하란 말을 하곤 한다. 생명과 관련된 아픔에는 정말 어떠한 위로의 말도 건네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외의 고통은 더 이상의 고통이 없기에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겪고 있는 그것이 고통일 수 있음은 차라리 얼마나 다행한 일이던가.

고통은 나를 한 뼘 자라게 해주었다. 아이들이 성장통을 앓으며 튼실하게 자라나는 것처럼 고통은 나를 키우는 훌륭한 자양분이 되어주었다. 물론 아무런 고통 없이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성장이 멈춘다한들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내적(內的)성숙 없이 참 평화를 깨닫기는 어렵다. 내 곁에 숨쉬는 평화를 발견할 수 있는 밝은 눈은 고통을 통해 성숙된 결실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모두 겪는 나무들만이 한 해 한 해 세포분열을 하며 나이테라는 연륜의 흔적을 새길 수 있듯, 내 인생의 사계 중 고통이라는 한 계절도 기꺼이 감내해 내고 싶은 것이다.

하늘 향해 자라나는 하늘바라기 나무들처럼 오늘도 나는 하늘을 본다. 하늘은 내 눈에서 열린다. 정말 깊은 평화이다. 하늘을 볼 수 있는 오늘이 행복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감사한 나는 나무들처럼 평화 향해 두 팔 벌린 평화 바라기로 우뚝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