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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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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누드


BY 선물 2004-02-17

가끔씩 외출이 꺼려질 때가 있다. 눈이 충혈 되어 있을 때가 주로 그러하다.  어디 중요한 약속이 있을 때 눈이 충혈 되기라도 한다면 일단은 외출을 접게 될 만큼 발간 눈을 내 놓고 다니기가 싫어진다. 간혹 사진을 보면 광선이 잘못 잡혀 억울하게 발간 토끼 눈이 된 채로 현상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 눈의 주인공이 누구든, 그것이 원래 눈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든 상관없이 일단은 무섭게 보이는 것이 확실하니 그런 사진도 나는 폐기 처분하고 만다.

 그러고 보면 거울 속의 내 눈도 그리 맑지만은 않다. 한 때 멀리서 달려오는 버스의 번호를 미리 알아보고 안내해 줄만큼 밝은 시력을 뽐내며 부러움을 샀던 두 눈이었지만 지금은 그때만큼 밝지도, 또 맑지도 않은 어정쩡한 상태가 되었다. 어른이 되면 아무래도 아이 때의 때묻지 않은 그런 청정한 두 눈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렵겠지만 그래도 맑은 눈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 같다. 눈이 자신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거울임을 무의식 중에라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누구나 깨끗한 눈을 가지고 나온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거짓도 배우게 되고 눈빛도 감추어야 함을 습득하면서 조금씩 혼탁해져 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감추어야 하고 숨겨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서로를 참 힘들게 만드는 일인 것 같다. 그래서 슬퍼진다.

 사실 나는 동물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래도 한가지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동물들은 맑은 눈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어릴 때 뒷 창고에서 보았던 족제비의 예쁜 두 눈을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것도 까만 별처럼 맑게 빛나던 영롱한 눈빛 때문이었다. 그 때부터 그 징그럽던 쥐까지도 까만 눈을 보게 되면 뭔가를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인간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참으로 가엾게 생각될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콩알 같은 눈동자일 뿐, 동물을 기르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지라 남편과 아이들이 강아지를 키우자고 조를라치면 호들갑스런 손사래 질을 해대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고 만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내가 여섯 식구에 강아지까지 기를 만큼 몸도 마음도 여유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내 마음에 잠깐의 갈등이 생긴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큰 형님(시누) 댁에서 보낸 두 마리 강아지와의 며칠 때문이었다.

 보통 개들은 시각보다 청각이나 후각 쪽이 매우 발달해 있어서 한 번 익숙해진 사람의 체취는 잘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했다가 다음에 만날 때 전과 똑 같은 반가움을 표현해 준다. 강아지를 무척 귀여워하는 남편은 털이라도 묻을까봐 곁에 오는 것을 꺼려하는 나와는 달리 강아지가 혀로 귀를 핥고 눈을 핥고 또 프렌치키스까지 하자고 덤벼들어도 내치지 않고 다 받아들여준다. 그런데 이 놈들이 용케도 그것을 기억했다가 해가 바뀌어 우리 가족을 만나게 되어도 남편에게 달려가서 꼬리를 있는 대로 흔들며 아낌없는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때 그 놈들의 눈빛은 그야말로 한없는 애정이 듬뿍 담긴 사랑의 눈빛이라는 것이 쉽게 읽혀졌다. 그래서 잠시 강아지를 키워도 좋겠다는 생각을 스치는 바람처럼 했던 적이 있었다.

 자신들을 아껴주면 그만큼 애정으로 답하는 강아지의 진실이 새삼 내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진심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인간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동물들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있어 잔꾀를 부리거나 거짓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 항상 변치 않는 맑은 눈빛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 혼자 사시는 한 할머니가 자신의 손녀손자보다도 함께 사는 강아지가 더 좋다고 하셨던 그 말씀이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되기도 한다. 궁둥이 한 번 토닥토닥 두들겨주면 할머니의 품으로 기어 들어와서 안기는 것이 노인네 냄새가 난다면서 꺼리는 손주들보다 몇 곱절은 사랑스럽다던 그 분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여 혼자서 고개 끄덕일 때가 점점 많아져간다. 그래서 또 슬퍼진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가끔은 희한한 생각에 빠져 들 때가 있다. 인간의 지능도 그런 동물들만큼만 발달하고 멈추었다면 정말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지능을 가진 인간이 그 지능으로 인간을 정말 얼마나 이롭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별로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를 않는다. 인간의 수명을 늘리고 교통을 발달시키고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었지만 그 대가는 훨씬 엄청난 고통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삶의 기반인 자연환경이 오염되고 문명의 이기에 생명을 저당 잡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똑똑한 사람이 이끌어 가는 세상은 정말 우리 인간들 멋대로 갖다 붙인 '개판인 세상'이 되어버렸고 서로를 뭉개고 짓밟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

 생각해보면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욕 중에는 유난히 개를 빗대어 하는 욕이 많은데 한가지 웃긴 것은 개보다 못하다는 것도 욕이 되고 개 같다는 것 또한 욕이 되며 개보다 못하다는 것조차 욕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쩜 그것은 개가 화를 낼 일인 것 같다.

 사실 이 세상은 똑똑한 사람이 인정받는 세상이지만 정말로 아름다운 세상, 살만한 세상은 그들의 머리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어수룩하지만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진실 된 사람들의 가슴에서 나오는 훈기가 오히려 그런 세상에 훨씬 가까워 보인다.

 이젠 더 이상 머리 좋은 사람이 필요한 세상은 아닌 것 같다. 진정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똑똑한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 바보 같은 사람이 더 많아지도록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 볼 일이다. 바보 같은 그런 사람이 희망으로 보여지는 것은 나의 지나친 독단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모두가 누드가 되어 벌거벗은 몸에 열광하고 있는 이 때 마음을 홀라당 벗고 맑은 두 눈 반짝이고 있을 동물 닮은 사람이 그리운 것은 그리 맑지 못한 두 눈을 가진 스스로에 대한 연민 때문이리라 변명해 보게 된다.

 오늘, 그렇게 마음이 누드인 사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