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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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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뿌리


BY 선물 2004-02-13

이제 그만 살아버려?"
 거울을 보면서 혼자 그렇게 빈정거렸다. 빗질을 하다가 보게 되는 무성한 흰머리 때문이다. '귀밑머리 파뿌리 되도록...'이라는 말은 웬만하면 누구나 듣게 되는 결혼식 주례사의 일부분이다. 흰머리 그득해질 때까지 소중한 부부의 인연을 끝까지 지키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직역을 해서 흰머리가 제법인 내 모습을 보며 그렇게 괜한 짜증으로 투덜거려보는 것이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젊음을 오래도록 유지했던 다른 신체부위보다 유난히 머리가 일찍 세어진 것을 보면 내 흰머리도 유전적인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런데도 뜬 금 없이 애매한 식구들에게 짜증이 나는 것은 가는 내 젊음에 대한 서글픔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까닭이리라.

 나에겐 어릴 때 엄마의 흰머리를 보면서 울었던 기억이 있다. 고운 우리 엄마 늙어지면 어떡하나 불안한 마음에 되도록 엄마 속을 안 썩게 해드리려고 무지 애를 썼던 나였다. 그 기억이 생생하여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면 억지효도라도 강요하고픈 심산으로 흰머리를 들이대며 시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딸아이, 아들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콧방귀도 뀌지 않는 것이었다.
"엄마 흰머리는 너희들 작품이다."
 아이들의 회개를 끌어 낼 요량으로 아예 이런 직설적인 표현까지 해 보았으나 돌아 온 것은 엄마의 유전적 특징이라는 맹랑한 대답뿐이었다. 공허한 마음에 남편에게 그 일을 하소연 해 보았지만 남편은 한 술 더 떠 아이들이 참 똑똑하다는 말로 나를 더 약오르게 하고 만다. 나이 차가 제법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흰머리가 한 두 개 눈에 띄는 남편의 새까만 머리가 그지없이 얄미워지는 순간이다. 가끔 잠든 남편에게서 흰머리를 발견하며 가졌던 묘한 연민으로 아릿하게 슬펐던 나 자신이 어리석게 생각될 만큼 그렇게 야속해졌다. 귀밑머리 파뿌리 되었으니 우리 그만 살자고 해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을 위인임이 분명해 보인다.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세월이 옛날과는 많이 달라 내가 아이였을 때처럼 감상적인 심성을 가진 아이들은 드물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 이름만으로도 콧날 시큰해지는 존재일 텐데 엄마의 흰머리를 과학적으로만 해석하려는 아이들이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든다.

 아마 갓 결혼한 뒤, 시어머님의 흰머리 상태가 지금 나와 비슷하든지 아니면 그보다 조금은 덜 했으리라는 기억이다. 지금도 여든을 코앞에 두신 분이 염색 한 번 안 하시고도 결코 추한 모습이 아닌 것을 보면 부러운 마음도 슬며시 생긴다. 새댁이었을 그 당시 어머님은 내가 곁에서 흰머리를 뽑아주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한 올, 두 올 뽑아 드리다 보면 어느 새 새근새근 잠이 들기도 했는데 그 시원함이 참 좋으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며느리가 십 년을 조금 넘기더니 계속 흰머리 타령으로 칭얼거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안쓰러워 하실 지 버르장머리 없다 하실 지 슬슬 궁금한 마음이 생긴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의 육신도 그만큼 닳게 되고 이리저리 노쇠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일 것이다. 그것을 허무해 할 필요도 없고 가는 세월을 안달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거울 속 모습을 보면서 때로 한숨짓는 것은 별로 이룬 것도 없이 시간만 보냈다는 안타까움이 어느 정도 작용한 까닭인 것 같다. 더구나 정말로 젊디젊은 여자들의 사회적으로 성공한 기사들을 보면 부러움과 함께 나 자신이 참으로 못나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 스스로에게만 들이대는 냉정한 잣대일 뿐, 주위의 노인들을 뵐 때면 사회적인 업적이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분들이 겪은 세월만큼 한결같이 우러러 보이니 나도 더 이상 비참한 생각을 가질 필요 없이 주어진 하루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면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 성당에서 요즘 보기 드물게 허리도 꼬부라지고 머리도 하얗게 센 어떤 할머님을 뵌 적이 있는데 그 분의 웃음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 지 곁에서 지켜보던 내 마음까지 훈훈해지는 것이었다. 성당 미사 시간에 주위를 둘러보면 젊은 사람들보다는 연세 드신 노인 분들이 훨씬 많음을 자주 느끼게 된다. 세상 끝 날이 다가올수록 사후(死後) 세상에 관심이 많아지고 더 겸허해지는 마음에서 종교에 마음을 의탁하게 되는 까닭인 듯하다.

 정확한 연세는 알 수 없으나 앞으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은 분명하게 짐작되고도 남을만한 모습들이셨다. 그런데도 어둠이라곤 하나 느껴지지 않는 밝은 웃음이 얼마나 내겐 아름답게 느껴지던지 한참을 그 분들의 웃음에서 눈을 거두기가 싫을 정도였다. '아, 정말 신나게 늙어 갈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 그런지 내게는 인간의 육체가 껍질로 생각될 때가 많다. 잠시 빌린 몸뚱어리 고이 잘 썼다가 언젠가는 벗어 던지고 훌훌 떠나야 하는 그런 껍질. 그래서 언젠가는 빈 껍데기가 되어 버릴 육신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이 못내 우스워 보이기도 한다. 인간의 몸을 기계에 비유하기는 그렇지만 그래도 세상에 이롭게 잘 쓰인다면 때가 되어 고장  나고 폐기처분된들 무에 그리 억울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나를 육체로부터 많이 자유롭게 해 줄 것 같다. 흰머리쯤이야 보기가 정 흉해진다면 염색해서 단정하게 하면 될 것이고 주름쯤이야 누구나 갖게 되는 세월의 훈장이라 생각하면 그 뿐일 것이다. 다만 내 몸이 아파서 한 몸 스스로 책임지기도 어려울 지경까지는 안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녹이 슬면 잘 닦아주고 작은 고장은 그 때 그 때 잘 고쳐서 생명이 붙어 있는 시각까지는 세상에 유용하게 쓰였으면 그래도 괜찮은 삶일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들이 예전의 나처럼 엄마의 흰머리로 칙칙한 감상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 차라리 고맙고 아내의 투정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남편의 여유도 감사하다. 그래도 살아갈 날이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 나, 어딘가에 쓰여지고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닳아 가는 육신이 오히려 자랑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나도 정말 신나게 늙어 가는 그런 노년을 갖게 되기를 지금부터 기대해보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