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사람의 모습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어쩌면 무섭게 보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습게 보일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의 사진 한 장을 신문 기사에서 보았다. 약간은 기괴한 모습인 그는 수십 년 단식하며 물 한 방울 없이도 살아간다는, 어쩌면 도인일 지도 모를 그런 사람이었다. 깡마른 삭정이처럼 야윈 몸에 뻐끔하니 퀭한 눈자위가 왠지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지를 않았다.
그 기사를 보면서 나는 역시 세속의 무지렁이답게 계속 유치한 의문들만 떠올리게 되었다. 먹지 않으면 배설도 하지 않을까? 아마 씻는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울 텐데 몸에서 고약한 냄새라도 나지 않을까? 입 안에서는 곰팡내가 풍길 텐데... 정말 그렇게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를 깨친다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인 지조차도 의문으로 떠올랐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해탈을 하게 되면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그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매력적으로 느낀 것은 부처가 된다는 것이 아닌,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그 자체였던 것 같다. 해탈이란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속세의 번뇌와 속박을 벗어나 편안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는데 복잡하고 고단한 세상 시름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고요한 평화를 갖고자 하는 바람을 한 번쯤 갖고 싶어했다면 그 해탈이란 것이 얼마나 큰 유혹으로 다가올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나도 늘 평화를 꿈꾸었다. 늘 머리를 비우고 싶었다. 때때로 세상 일이 하찮게 느껴지거나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싶을 때 어디론가 훌쩍 떠나 나를 옥죄고 있는 모든 굴레로부터 자유로와 지고 싶어진다.
그래서 외딴 곳이라는 말, 홀로라는 말들이 자꾸 매력으로 느껴진 것이다. 그렇게 떠나 있음이 곧 평화를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그 사진의 주인공 모습에서는 평화를 느끼지 못하고 공허함을 느낀 걸까? 비움으로써 채워짐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 사람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 많은 가난을 느꼈으니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것, 그것이 참으로 쓸쓸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내 속물적인 눈이 진실을 보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비록 그 진실이 내가 그토록 원하던 평화라 하더라도 그것을 얻어 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니 참 묘한 일이다.
여전히 세상 일에 집착하는 내 마음이 미운데, 여전히 나는 세상 것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데 왜 그것을 얻은 사람의 모습에서 부러움이 느껴지질 않는 것일까? 그래도 배고픔을 느끼며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추위를 느끼며 따뜻함을 누리고 싶고 아픔도, 설움도 겪으며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 것만 같다.
아직은 인간의 감정들, 그 희로애락을 통해 꿈틀거리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도'의 경지에 이르면 한낱 거품과도 같은 하찮고 순간적인 것들에 집착하는 중생들이 가엾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속인인 내 어리석은 눈으로 본 도인의 모습도 평화롭기보다는 왠지 외롭게 보이고 가여워 보인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대책없이 배짱 편한 속인인 것 같다. 이미 깨끗하게 정화되어 먹지 않고 씻지 않아도 더 없이 맑고 깨끗하게 살아갈 사람의 배설이나 냄새따위를 걱정하는 스스로가 한없이 딱한 사람인 줄도 모른 채...
그 한 장의 사진을 보고난 후, 나는 방 바닥에 드러누워 이리저리 뒹굴면서 계속 머리를 아프게 한 내 고민들과 자잘한 걱정들을 그냥 껴 안고 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걱정도 하며 한숨도 쉬며 그저 가끔 그렇게 떠나고 싶다는 꿈이나 꾸면서 땅을 딛고 사는 사람답게 사는 게 젤로 좋겠다는 참으로 나다운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스르르 행복한 낮잠에 빠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