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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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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방엔 무언가가 있었다. (회색빛 젊음을 추억하며)


BY 선물 2003-11-28

 

언제나 추억으로 남겨진 기억들은 아름답다. 그 날의 진실보다 오히려 더 아름답게 채색되어 기억 창고에 보물처럼 들어앉는다. 그래서 오늘이 외롭거나 가슴 헛헛해질 때면 만질 수도 없는 그 추억이란 보석을 꺼내 들여다 보고 싶어진다. 지금의 오늘이라는 시간에 지나간 오늘을 쓸쓸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들여다 보는 것이다.
지금의 오늘도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가면 또 그렇게 추억 속의 하루가 될 것임을 위안 삼으면서...
그래서 조금 힘들어도, 조금 아파도 견디어 낼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회색 빛 어두운 젊은 날도 그렇게 아팠는데 지금은 그리움이라는 하나의 점으로 빛나고 있으니...

누구나 젊음을 생각하면 생동감 넘치는 밝은 색깔을 떠 올릴 것이다. 건강한 젊음을... 그러나 내겐 그 시절이 왜 눈물로 기억되는지 나조차 알 길이 없다. 아무리 돌아봐도 그렇게까지 괴롭게 젊음을 보낼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 어두움을, 우울을 많이도 사랑했고 또 즐겼다는 것.

유유상종이라고 한 사람을 앎에 있어 아주 정확한 지표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주변의 친구를 보는 것이리라. 소위 끼리끼리 어울리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나의 어두움이 조금은 이해될 듯하다. 친구 사이였던 우리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 모두가 아픔 한 가지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들을 서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저 짐작 만으로 그 아픔을 유추했을 뿐... 우리는 그렇게 막연한 심정으로 그저 함께 있다는 것 자체에 위로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우리를 밝혀 주는 위로가 아니라 점점 더 깊고 깊은 심연의 세계로 가라앉게 하고 말았다.

나는 그 찬란한 젊은 날에 도대체 무엇을 아파한 걸까? 내가 갖고 있는 우울은 사실 한 개인의 역사 속에서 찾아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린 날부터 나는 가족 속에서의 소외를 느껴야 했다. 지금 돌아보면 아주 우스운 일이지만 어린 날, 그 어린 아이에게는 분명 절절한 아픔들이었다.

2남 2녀 중의 둘째로 태어난 나는 알 수 없는 열등감을 홍역처럼 앓고 있었다. 내 아래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성공이라며 기뻐 하셨다는 것을 친척들끼리 무심코 지나가는 말로 했는데 어린 나는 유심히 귀담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작은 눈에 주저앉은 코를 가진 곱슬머리의 나는 아버지 눈에 꽤 실망스러웠던 것 같다. 그러나 세 살 아래의 여동생은 왕방울만한 눈에 하얀 피부를 가진 인형처럼 예쁜 아이였으니 아버지는 당연히 성공이라는 말씀으로 기쁨을 표현하셨을 것이다.

그 때부터였을 것 같다. 아버지가 조금만 나무라셔도 서운함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께 나는 실패작이고 아버지는 내게 무서운 분이란 생각만 들었다. 그런 생각들은 나를 외곬로 만들었고 그런 내 모습들은 또 피드백이 되어 다시 아버지 눈 밖에 나게 되는 악순환을 초래했으니 유년이란 정말 조심스러운 시기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내 자아는 계속 그런 열등감 속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위로 아래로 형제들은 여러모로 두각을 드러냈던 데 비해 나는 너무나 조용하고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부모님께서 정말로 차별하셨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몸이 말랐다고 내게 쏟으신 정성을 생각해 보면 내 열등감은 스스로 만든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점점 친구가 좋아졌다. 공부는  자꾸 제쳐 두고 싶었다. 아무리 잘 해도 형제들을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집에서는 비교적 조용한 아이, 순하기만 한 아이, 눈에 띄지 않는 아이로만 생각되었을 것이다.

고 2 때 서울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오빠의 대학진학을 위해 아버지가 서울로 직장을 옮기신 것이다. 전학 문제로 여동생과 나는 대구 큰 댁 곁에 잠깐 있게 되었는데 그나마 동생마저 전학이 빨리 되는 바람에 얼마 간 가족과 떨어진 혼자 만의 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그 후 뒤늦게 서울생활에 합류하게 되었지만 알 수 없는 소외감은 여전했고 나의 그런 심리 상태는 가족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진학 또한 부모님을 흡족하게 해 드리지 못했다. 가끔 우리 형제들에 대해 소개할 일이 생기면 나는 정말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은 심정일 뿐이었다. 부모님의 자랑거리에 나는 누를 끼치는 아이였을 뿐이었다. 열등감은 생각보다 사람을 훨씬 슬프게 한다. 그리고 못나게 만든다. 아마 그런 성장과정들이 내게 내재한 우울의 근간을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이런저런 내 열등감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자라온 과정일 뿐이니까 이해받기도 어려운 것일 것이다. 친구들 또한 한 가지쯤은 말 못할 사연들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굳이 아파하는 것을 들추어 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함께 술이나 마시고 한바탕 울기도 하며 아픔들을 발산하는 것 만으로도 우린 충분했다.

물론 젊음의 객기들로 인해 좋지 못한 기억들로 안고 가야 할 일도 많았다. 그 중의 하나가 술과 담배였다.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담배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에게 담배는 해로운 것이라는 생각일 뿐, 여자라는 이유에서 담배를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여자가...>라는 조건부 어휘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교육자 집안의 한 친구는 그것을 부모님께 들킨 뒤로 더 많은 방황 속에 헤매게 되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 속의 한 장면이 있다. 그 날은 유난히 친구들이 우울 무드를 탔던 것 같다. 우리는 역시 술을 마셔야만 했다. 그 때 내가 평소 좋아하던 한 친구가 화장실에서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화장실에 걸린 거울을 주먹으로 쳐서 깨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친구의 손에서는 섬뜩하리만큼 검붉은 선혈이 그야말로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친구는 늘 말이 없어  누가 먼저 말을 걸어야만 대답할 정도로 조용한 친구였다. 우리는 병원으로 가서 응급치료를 한 뒤에 모두 그 친구 집으로 가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 친구에게 우리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아픈 사연들이 많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픔의 깊이는 친구의 방을 본 뒤에야 조금은 더 구체적으로 가슴에 닿게 느꼈던 것 같다. 연희동 예쁜 이층 집 친구의 다락 방에서 보았던 소복이 쌓인 담배꽁초들, 이리저리 나 뒹구는 빈 술병들, 그리고 간간이 들리는 기적 소리, 김현식의 슬픈 음악들이 그 친구의 고뇌에 조금은 다가설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친구는 너무나 외롭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고통스럽게...

그 때 우리는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무엇이 우리를 울렸는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저 울고 또 울어야만 살 것 같았던 그 때... 사실은 그 정체불명의 울컥하는 슬픔들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젊음은 갔고 몽롱한 기억만이 이렇게 곁에 머물며 날 서럽게 한다.

재작년 그 친구는 37살이 다 되어 결혼을 했고 아줌마의 모습으로 축하를 해 주러 간 나는 정말 오랜만에 그 날 함께 했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더 이상 어두운 얼굴은 없었고 모두 아이들 이야기, 남편 이야기, 시댁 이야기로 수선스럽게 한바탕 왁자지껄하며  떠들어대는 아줌마 부대가 되어 있었다. 아무도 더 이상 지난날을 들추어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 세월을 완전히 떠나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때로는 그 젊은 날의 심정으로 돌아가 아플 때가 있다. 그것은 어쩜 내 영원한 불치병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