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1이나 된 딸아이는 아직도 혼자서 머리를 감지 못한다. 목욕도 욕실 문을 열어 놓아야만 할 수 있다. 이미 몸은 어른의 형태를 갖추었으니 부끄러움도 알아야 한다고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부끄러움보다 더 딸아이를 힘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서움이다. 우리 부부를 지금까지 각 방 쓰게 만든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절대로 혼자 못 자겠다는 딸. 지금 양상으로 보자면 아마 그 아이 곁에 듬직한 배우자가 생기고 난 후에야 겨우 나도 남편 곁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떨어져 자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서로의 존재가 조금은 귀찮게 느껴지는 그런 부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딸 아이의 무서움이 그 정도인지라 바쁜 아침에 머리까지 감겨줘야 하는 수고로움이 비록 벅차기는 해도 별 다른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 아이를 혼내기에는 내게도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비밀이 있는 지라 그저 힘든 대로 참아가며 딸아이 시집 보낼 날 만을 애타게 기다려 볼 뿐이다.
내 부끄러움이란 것을 이야기 하자면 그 전에 먼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일화부터 꺼내야 한다. 그래야만 좀 더 멋있게 그 이야기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신채호선생님의 일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아마 세수법에 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분은 세수할 때 허리와 고개를 굽히는 법이 없이 그냥 서서 손으로 물을 찍어 얼굴에 바르고 다시 물을 찍어 얼굴에 바르는 식으로 세수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세수를 하면 당연히 바닥과 옷이 온통 물에 젖어 버리게 되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말들을 하였지만, 단재는 오히려
"옷 젖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소. 나는 다만 고개를 숙이기가 싫을 따름이오." 라고 답했다고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았던 단재 선생님의 자존과 절개의 자세가 잘 드러난 면모였다.
나도 가끔 단재선생님처럼 옷이 젖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그 분의 세수법을 감히 같은 맥락에서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사실 이 이야기에 그 분을 모셔 오는 것조차 예의가 아닌 듯 해서 걱정될 정도이다.
누군가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었다. 매우 무서운 이야기이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가끔 인기척을 느끼거나, 아니면 왠지 누군가가 있는듯한 느낌이 자꾸만 들 때,그런 때는 정말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누군가란 다름아닌 바로 귀신이다. 도대체 겁이 많은 내게 누가 무슨 심정으로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해 줬는 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정말 그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조금만 느낌이 이상해도 막 무서워지는 것이다. (아,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난 혼자인데 등 뒤가 자꾸 무섭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 또한 샤워를 하거나 머리를 감을 때 머리를 숙일 수가 없다. 누군가 내 머리위에 있는 것 같아서... 세수 또한 마찬가지이다. 고개를 숙였다 일으키면 거울에 누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가끔 겁이 나면 그냥 얼굴을 들고 세수를 하기 때문에 옷이 다 젖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늘 그렇게 겁이 많은 것은 아니다. 아주 가끔 갑자기 그런 무섬증이 도질 때가 있을 뿐이다. 아직 어리다면 나도 딸아이처럼 사람들을 불러 곁에 있게 하련만 어른인 체면에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단재선생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 같다.
신앙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사실 이렇게 귀신을 두려워하고 쩔쩔매며 산다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아이에게는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면서 평소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바보같은 모습 보이지 않는다고 나무라는 자신이 정말 한심스럽기도 하다. 그런데도 마흔 다 된 어른이 아직도 별 일도 아닌 것으로 호들갑을 떨고 있으니 가끔은 내 어린 날에 무슨 심한 충격이라도 받았는 지 한 번 검사를 받고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여전히 딸아이도, 나도 공포영화라면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고서라도 보고싶어 하는 것을 보면 그런 유치한 공포를 은근히 즐기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린 어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바보처럼 비실거리며 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