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떨이 갖다 줘!" 남편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응? 애더이?"
"뭐?"
"애러리?"
"뭐라구?"
"배터리!"
"푸하하...재떨이!"
"나 안해!"
며칠째 우울해 하고 있는 남편을 어떻게 해서든 웃겨 주고 싶었다. 그래서 재떨이를 가져 오라는 남편의 말에 지난 밤 함께 보던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떠올라 그것을 흉내내어 엉뚱하게 반응해 본 것인데 남편도 그 장면을 떠올렸는지 결국 굳어 있던 얼굴을 누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인 성격의 남편은 스스로 힘들게 살아 가는 성향이 있는데 몇 년째 하는 일마다 제대로 풀리지 않자 그동안 가능성과 희망에 나름대로 의지하며 위로받던 것조차 힘들어졌는지 드디어 지친 기색이 역력하게 나타난다.
"나도 저건가 봐."
뉴스에서 우울증에 대한 기사가 나오자 불쑥 꺼낸 남편의 말이다. 웬만하면 아내에게까지 신경쓰이게 하는 일 없게 하려고 혼자서 모든 어려움을 짊어지고 가려 했던 남편이다. 그런데 이젠 정말 더 이상은 힘든지 짐을 조금이라도 내려 놓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뒤로는 나도 겉으로만 웃을 뿐, 이렇게 마음이 추울 수가 없다. 그래도 곁에 있으면 힘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한 순간도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엉뚱한 이야기들을 늘어 놓으면서 재잘거리고 있다. `정말 심각하면 이마저도 뿌리치겠지.' 그런 생각에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초긴장상태가 되어 어떻게 해서라도 남편을 웃길 요량을 하며 있는 머리 없는 머리 다 짜내느라 나조차도 힘이 무척 쓰인다. 그러다가 한 번이라도 남편이 웃어주면 눈물나도록 고마운 마음이 되고만다.
어릴 때 부모님들을 뵈면 언제나 강해 보이셨다. 어떤 경우에도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나를 보호해 주실 분으로 믿어졌고 그 보살핌 속에서 참으로 안온한 평화를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가면서 점점 작아져만 가는 부모님의 뒷모습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때는 정말 한없이 깊은 늪 속으로 자꾸만 가라 앉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여보, 자기가 우울하면 안 돼요. 난 그런 모습 정말 못 보겠어."
힘들어 휘청거리는 남편에게 나도 모르게 불쑥 내뱉은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고 위로도 못 되는 철없는 말을 그렇게 불쑥 내뱉고 말았는지 내 얄팍한 입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이 진심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의 쓸쓸하고 지친 뒷모습만큼은 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가끔씩 남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종자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가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 자리가 얼마나 힘이 들고 외로운 자리인지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지금은 그런 생각이 온 데 간 데 없어진다. 하긴 그런 무거운 자리가 어찌 남자의 자리이기만 할까. 어머니의 자리 또한 결코 그 못지 않은 무거운 어깨 감당해야 할 자리이리라.
그러나 아직은 더 어리광 부려도 되는 철부지이고 싶다. 귀 막고 눈 가리고 남편을 모른 체 하고 싶다.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것. 그것이 이미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내 평생의 동반자의 쓸쓸한 뒷모습이 몹시 아픈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