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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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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엄마


BY 선물 2003-08-09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무슨일이었는지 확실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집안 친지들이 다 모이게 되었다.
위로 형님(시누님)들이 네 분이라 조카들까지 다 오고 외숙부님,외사촌식구들까지 모두 모이면 30명이 금세 훌쩍 넘어버렸다.
아직 서툴기만 한 새댁이었던 나는 손님 치룰 일이 꿈만 같아서 머리까지 아파왔다.
`아,이럴줄 알았으면 시집오기 전에 엄마말씀 잘 들어서 음식장만 하는 법도 제대로 배울걸...'
그제서야 예전에 직장생활하느라 힘들다는 핑계로 집안 일에 꾀부렸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다행히도 모두가 손위 시누님들이라 새댁인 나를 많이 도와주셔서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손님을 치룰 수 있었다.
그래도 일단 책임이 나에게 있었던지라 긴장감에 사로 잡혀 있던 나는 오히려 씻어 놓은 쌀에 물도 붓지 않은 채로 밥을 하는 큰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모두들 밥 타는 냄새에 깜짝 놀라며 당황하는데 그순간  정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따로 씻어 놓았던 쌀이 더 있었던지라 가까스로 그 위기를 어떻게 수습은 하였으나 철렁했던 가슴은 한동안 나를 허둥대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괜시레 서러워지면서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만 남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따지고 들자면  사위들도 남이지만 그 자리는 똑같은 남이라도 대접 받는 남이고 며느리는 대접해야 하는 남이니 이런 때 같은 입장의 동서라도 있다면 큰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에 외며느리는 정말 외로워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그 낯설었던 시댁식구들도 친숙한 가족으로 다가왔고 나 또한 형님들의 배려와 사랑을 받게 되는 한 식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내 마음 속에는 아직도 동서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아 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모르는 소리 하지말라는 이야기를 잘 한다.
외며느리가 백 번 편하다는 그들의 말에 동서가 있음으로 해서 힘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다치게 되는 경우가 많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자꾸 나는 다를 것만 같고 동서가 있으면 위로든,아래로든 물처럼 섞여 마음을 나눌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 큰엄마 때문이다.

막내 며느리였던 엄마는 참으로 인물이 고우신 분이다.아버지께서 단 한 번을 보시고 바로 그 자리에서 결혼을 결심하실만큼 곱고 영리하게 생기셨다.
거기에다 성격도 아주 무난하셔서 시댁식구들에게 귀염을 많이 받고 윗동서들과도 사이가 좋으셨다.
그러나 그러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엄마보다는 큰엄마의 덕이 더 컸던 것 같다.
울산 큰애기셨던 큰엄마는 언제 보아도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자애가 넘치는 분이시다.
그리고 막내 시동생이셨던 아버지를 옆에서 뒷바라지까지 하신 분이라 시동생이 아닌 아들처럼 아끼셨다.
그래서 우리 집과는 더 각별한 관계가 되었고 우리 형제들 또한 그 분의 사랑에 마치 친자식처럼 따르게 된 것이다.
특히 4남매 중에 가장 기가 여리고 또 잘나지 못했던 나를 큰엄마께서는 더 많이 거두시고 어디 놀러 가실때에도 다 큰 사촌언니,오빠들대신 그 자리에 나를 챙겨주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한참을 커서도 엄마의 친인척 관계를 시댁과 친정으로 나누는 일이 참으로 어려웠다.
양가가 너무 잘 어울리고 친해서 그저 모두 우리 친척이었을 뿐 나누어 생각하게 될 일은 없었던 것이다.

오빠의 대학진학문제로 아버지께서 서울로 직장까지 옮기시고 이사를 하게 되었을때이다.
당시 여고2학년이었던 나와 세 살 아래의 여동생은 전학이 늦어져서 큰 댁 바로 옆에 따로이 방을 얻어 지내게 되었다.
식사와 빨래 등은 모두 큰엄마께서 해주셨고 부모님과 처음으로 떨어져 있는 우리 자매의 그리움까지 큰 엄마께서 덤으로 메꾸어 주셨다.
그나마 여동생은 나보다 일찍 전학하게 되었고 혼자 남아 있는 나는 밤마다 해리 닐슨의 `Without You'를 들으며  눈물로 이불을 적시곤 하였는데 그래도 언제나 그런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신 큰엄마덕분에 나는 몇 달간의 가족과 떨어진 시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하루는 손님접대 음식을 만드시느라 바삐 움직이시는 큰엄마 옆에 가서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부침개를 냉큼 집어먹은 일이 있었는데 아마 그 부침개가 한접시용으로 하셨던 것인지 "아이고,그건 묵으면 안되는데..."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무안함이 밀려와서 어쩔 줄 몰라하던 나에게 큰엄마는 다시 "아이다.아이다.그냥 묵어라.요럴 때 묵는게 젤로 맛있다.괘안타.내가 미안하데이."라며 안아 주시는 것이었다.
그 때 목에서 울컥하는 울음이 올라왔는데 그것은 민망함이나 서운함이 아닌 죄송함과 감사함때문이었다.
그 몇 달간의 큰엄마음식은 두고두고 그리울만큼 나에겐 사랑으로 배불렀던 음식이었다.

내가 서울로 전학을 하게 되고 결혼을 하게 되면서 큰엄마와는 연락이 뜸해졌지만 어쩌다 남편 출장으로 대구 갈 일이 생기면 남편조차 큰 댁으로 같이 가자고 할만큼 큰엄마는 시집 질서에게까지 자애로우신 분이시다.
꽤 오래전 여동생 대학졸업식 때도 큰엄마께서 올라 오셨는데 그 때, 지금은 제부가 된 당시의 여동생남자친구를 졸업식장에서 보시더니 "아이고,자네가 꽃돌인가?"라며 웃음을 자아내게 하셨다.
물론 전날 여동생이 큰엄마께 "큰엄마,내일 제 꽃돌이도 큰엄마께 인사드리러 온대요."라고 했던 까닭이다.
꽃돌이를 정말 남자 친구 이름인줄로만 아셨던 큰엄마.
아버지께서 얼마전 병환이 생기셔서 좀 쉬셔야 했을 때도 오죽하면 대구 큰엄마 옆으로 가시고 싶다는 응석을 부리셨을까.
그런데도 그것을 마냥 웃으시며 말씀하시는 엄마를 뵈면서 참으로 덕이 많으신 큰엄마인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지금도 명절때 엄마가 내려 가시면 윤주 몫이라며 따로이 참기름을 짜서 보내시고 남편 좋아한다고 고추장을 눌러 담으시는 큰엄마가 나는 안기고 싶을만큼 따뜻한 그리움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 분은 내게 늘 큰어머니가 아닌 큰엄마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