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에 어디 가는 거야?"
"황 부장님이 이 앞에 와 있데...."
밤 10시에 일도로부터 잠깐 보자는 전화가 걸려왔다.
"혼자 괜찮겠어?"
"아무렴...설마 그 때 그 일로 나한터 풀이를 하려겠니...."
"그렇긴 하지만....사람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방금전까지만 해도 신경질적으로 꼬투리를 잡던 정민은 못내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나경은 친구의 어깨를 툭 치는 것으로 안심하라는 말을 대신했다.
예기치 않았던 일로 주먹질을 했던 일도였지만, 나경에게는 한없이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저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자신에게는 조금치의 가슴도 열어주지 않느냐는 투정조차도 하지 않는 일도에게 나경은 미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걱정했던 만큼은 아니라 다행입니다."
지니치다 싶을 정도의 경어로 덧나버린 상처를 감추고 있는 일도의 얼굴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더욱 슬프게 보이고 있었다.
"용건만 간단히 말하죠...."
일도는 양복의 속주머니에게 다시금 되돌려졌던 사직서를 꺼내었다.
"황 부장님..."
"정말....내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받아줘요."
미치도록 보고싶어 한달음에 달려왔다.
무릎이라도 끓어 그녀의 지친 마음을 풀어줄 수만 있다면 무릎이라도 끓을 비장한 각오로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짜잔하고 나타났을때....혼자가 아니었던 자신을 향해 그녀도 이런 비참함으로 가슴이 조여들었을 것을 생각하니....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그렇게 보고파 한달음에 달려왔던 기혁은 일도의 손을 맞잡는 그녀를 보고 말았다.
헉!
숨이 멎어버리는 것 같은 답답증으로 으악! 괴성이라도 질러버리고 싶었다.
"나경씨...."
일도의 손에 쥐어져 있는 사직서를 받아든 것은 또 다른 약속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녀는 어렵게 사직서를 되받아쥐었다.
"할 일은 끝났으니 그만 가보겠습니다."
한치의 미련도 없이 일도는 돌아섰다.
"저 친구는....."
그 보다 먼저 뒤돌아서 가는 기혁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게 해버리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얄팍한 생각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가슴을 차지해버린 남자는 따로 있었고, 그 흔적을 지워내는 것은 온전히 그녀의 몫으로....무작정 기다리는 일 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랑이 되버릴 것이다.
"네, 부장님....'
"그 친구가 오해 했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친구가 우릴 봤어요....어두워서 사직서를 받아드는 모양새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가 나를 찾아왔단다!
"그냥 그렇게 두면....골이 깊어질 것 같아서요....그러면...나경씨가 더 많이 아파할 것 같아서....전화하는 겁니다."
나경은 미안하다고 해야할지, 고맙다고 해야할지를 몰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여린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진심으로....나경씨가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뚜뚜......대화의 단절을 말하는 신호음이 귓가로 전해지고 있었지만, 나경은 폰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술이라도 한잔 진하게 해야겠군....잘 살아라, 내 첫사랑아....
제대로 된 시작도 해보기 전에 끝나버린 첫사랑의 행복을 위해 건배....
뚜뚜....뚜...뚜...
설마했더니 역시였다.
밤이 새도록 기혁과의 전화 연결을 시도했지만, 분발로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