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영감이 무척 맘에 드네
오늘은 오랜만에 산행을 했다. 나는 추석 전부터 산행은 자제하고, 만보걷기로 산행을 대신했다. 영감은 꾸준히 산행을 했지만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시원찮은 마누라를 닦달을 할 수도 없었겠고. 추석이 지나고는 내가 더 안 좋은 상황이라, 한동안 아예 만보걷기도 잊고 살았다.
오후 3시. 뙤약볕을 피하느라 좀 늦은 시각에 나섰다. 그러나 산 입구를 들어서며 오산이었음을 알았다. 녹음이 우거진 산행 길은 적당히 그늘이 져서, 산행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오늘은 좀 덜 올랐으면 싶은데, 그건 영감 마음이지. 걷다가 마누라가 안 돼 보이면 그만 걸을 테지.
그래도 많이 봐 주는 모양이긴 하다. 앓고 난 마누라의 행차(?)랍시고 뒷짐을 지고 설렁설렁 앞서 걷는다. 사람들은 내가 ‘옛날사람’이라서, 영감보다 뒤서서 걷는다고 수다를 떤다. 그런데 누구라도 내 영감과 나란히 걸어보라지. 그 긴 콤파스를 나란히 따를 재간이 있는가 말이다.
오늘도 나는 서너 발자국을 뒤처져 걷는다. 요 짧은 콤파스가 원흉이라니까. 그동안은 마누라를 떼어놓고 산행을 했으니, 아마 긴 두 팔과 긴 두 다리께나 휘젓고 걸었겠지. 한참을 걷다가는 마누라도 잊었나 보다. 저만큼 멀어져서는 ‘아차차’ 싶은가. 하하하 웃긴다. 뒤를 돌아보고 섰다.
‘휴~~~.’ 이럴 때마다 나는 백조가 된다. 우아한 백조가 물 밑에서 쉼 없이 짧은 다리를 바둥거리는 모양이라니. 으하하. 감히…. 너무했나? 아무튼 겨우 따라붙으면 다시 달아나고, 또 따라붙으면 다시 달아나는 영감. 재미있나 보다. 얼굴을 돌리고는 씨~익 웃어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미세먼지가 또 말썽이라 해서 마스크를 썼지만, 답답해서 벗어버리고 싶지만 참자. 바람도 없고 좀 지나자 미세먼지도 보통이라지만, 그렇잖아도 곱지 못한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리는 건 더 싫으니까. 앞뒤로 챙이 아주 넓은 모자를 하나 구입해야겠다. 뒷목이 새까맣게 그을린 것도 꼴적긴 하지.
사실은 오늘 단풍을 보고 싶어서 나왔는데 너무 성급했나 보다. 북한산 둘레길은 아직 단풍이 볼만하지가 않다. 평일인데도 등산객은 제법 붐빈다. 체육공원에서 숨을 고르고 앉았으려니까, 한 무리의 여성 등산객이 내 앞을 지나간다. 물색 곱고 야시시한 등산복이 내 시선을 끈다.
내 등산복을 내려다본다. 아, 낡았다. 아니. 서슬이 낡은 게 아니라 옷이 구식이다. 소재도 디자인도 모두 구식이다. 요새 누가 점퍼식 등산복을 입는다구. 그러구 보니 20년은 입었나 보다. 그렇겠다. 20년 전에는 등산을 자주 다니지는 않았으니, 아직 새 것인 채이긴 하다. 그때는 제법 거금을 들인 기억이 난다.
어쨌든 구식은 구식이다. 내친김에 영감의 등산복을 훑어본다. 그래도 영감은 새 디자인의 등산복을 입혔네. 음. 그렇지. 입혔다는 게 맞은 표현일게다. 그이는 자기 옷을 자기 손으로 사 본 역사가 없으니까. 아, 영감은 작년 동창회에서 간 가을야유회 때 사 입혔었지.
“와~. 내 등산복이 많이 구식이네. 이런 줄 몰랐네.”
큰 발견이나 한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떠들자, 영감이 내 등산복을 찬찬히 훑어본다.
분명히 영감은 아직 새 것 같다 할 게 뻔하니, 호들갑을 떨며 20년도 지났다고 역설을 하고 또 역설을 한다.
“이참에 50년 된 영감도 개비(새로 장만)하시게나.”
“뭐여, 당신. 지금 나 안 사주겠다는 겨?”
“아~니. 내가 감히 어떻게…. 난 아무 말 안 했어.” 크. 크. 크. 오늘 영감이 무척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