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만 남았네
오늘은 세브란스병원엘 다녀왔다. 요새로 여기저기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병원을 자주 찾게 된다. 이른 시간으로 진료를 배정 받아서 아침이 무척 부산했다.
오늘은 아니, 요번에는 아이들도 바빴는지 문안 전화 한통이 없다. ‘긴병에 효자 없다.’더니 나도 벌써 닥친 건가. 두 늙은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철을 타고 병원에 도착했다.
아는 이들은 익히 알겠지만 세브란스가 알고 나면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데, 첫 나들이에는 요란스럽게 복잡해서 늙은이 혼을 빼 놓기가 일쑤였다.
결국은 다 떠나고 곁에 영감만 남았으나, 영감의 인지도가 나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절감한 하루였다. 허긴. 나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그래도 곁에서 애를 써주는 게 눈물이 날만큼은 아니어도 어쨌든 고마운 일인지고.
접수구도 많고 무슨 원무과도 그리 많아서 물어보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이르는 대로 일은 잘 마무리를 했다. 병원의 간이벤취에서 한 숨을 돌리자니, 이젠 끝냈다는 안도감에 맥이 빠졌다.
그래도 말 없는 영감보다는 물어서라도 갈 곳을 찾는 것에는 내가 한 수 위다. 직원이나 안내테스크를 이용해도 좋으련만, 우리 집 남자들은 뭘 물으면 큰일이 나는 줄로 안다.
병원에서 점심을 해결하자니 시간이 너무 이르다. 그렇다고 두 번씩이나 환승을 하며 지하도를 드나들긴 더 번거롭다. 전철역에서 내 집까지는 도보로 3분 거리다. 여기에는 두 늙은이가 오붓하게 점심을 나눌 마땅한 식당이 없다.
집으로 들어오니 점심 챙기기가 귀찮아진다. 간단하게 뭐 먹을 게 없을까. 국수를 삶아? 그래 국수를 삶자. 시원하고 얼큰한 열무김치국물이 넉넉하니 <열무김치비빔국수>를 해 먹자.
생전에 들어 보지도 못한 <열무김치국물말이 비빔국수>. 내 멋대로 이름을 지어 유리그릇에 삶은 국수를 서리서리 틀어 앉힌다. 고추장과 약간의 설탕을 얹고 시원찮은 치아를 걱정하며 열무김치를 잘게 썰어 얹는다.
솜씨 없는 며느리가 양념만 축낸다더니, 나도 얹을 수 있는 양념은 모두 챙겨서 한껏 맛을 내 본다.
빨간 열무김치 국물을 그릇에 둘러 붓고, 얼음을 동동 띄워 놓으니 그럭저럭 비주얼이 괜찮다.
오~호라. 어느 새 대접을 다 비운 걸 보니, 맛이 괜찮았나 보다. 아니, 시장했었나? 사실 영감은 대단한 미식가다. 그래서 나는 영감에게 음식으로 점수 따는 일은 포기한 지가 오래다.
“엄마. 병원에서 뭐래요?”라는 아이들의 전화를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동행은 못했어도,
“엄마. 병원 잘 다녀오셨어요?”라는 안부전화는 있어야 하는 거 아녀?
“지지배배 지지배배.” 핸드폰이 노래를 한다. 옳거니. 그러면 그렇지. 누구의 전화인지도 모르면서 기분이 굿!
“병원 잘 다녀오셨어요?”막내딸아이의 목소리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도 한참은 철이 덜든 어린아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