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은 왜 끓여요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책상 앞에서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고 앉아 있다. 이리 저리 엡서핑도 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런데 주방으로부터 맛있는 냄새가 내 코를 자극하며 내 방으로 흘러든다는 거 아니겠어? 킁킁거리며 , 코를 벌름거리며 일어서니 아~ 라면이 끓는 냄새다. 나도 모르게 냄새에 이끌리어 자리에서 일어난 김에 주방으로 향한다.
영감이 바지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렌지 앞에서 서성거린다.
“라면을 끓여요? 왜요?”
“….”
“라면을 왜 끓이냐구요.”
“….”
영감은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멀뚱하게 서서 내 물음의 진의를 곱씹고 섰다.
“라면을 왜 끓이겠어. 먹으려고 끓이지. 지금이 몇 시야. 밥을 언제 해서 먹나.”
그러니까 시방 배가 많이 고프다는 이야기이다.
“배가 고프면 라면을 끓일 게 아니라 밥을 좀 앉히지요.”
말없이 한참 나를 내려다보던 영감이 입을 연다.
“이젠 별 걸 다 하래. 나보고 밥까지 하라구?”
“아니. 밥을 좀 할 수도 있지 뭘 그래요. 하는 일도 없으면서.”
아차차. 아이들 말대로 일절만 했어야 할 것을. ‘하는 일도 없으면서’하는 대목이 사단을 불렀나 보다. 영감이 쌩~하고 주방을 나서서 안방으로 향한다. 이건 시방 영감의 기분이 대단히 나쁘다는 신호다. 후회가 막심하다. 라면을 먹겠다면 먹게 놔 둘 일이지. 나더러 끓여달라는 것도 아니고, 본인 손으로 끓여 먹는데 말이지. 잘 못해도 한참을 잘 못했다고 자책을 한다. 원래 말없는 사람이 화가 나면 더 무서운 법이거든.
그 사이 라면이 다 끓여졌기에, 쟁반에 얹어 안방으로 들고 간다. 영감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건 화가 대단히 났다는 영감식 표현이다.
“라면 다 불어요. 어서 자셔요.”
의미가 심장하게 나를 쏘아본다. 그래도 젓가락을 들어보이자 한참을 망설이다가 받아든다.
라면을 다 먹으면 잽싸게 커피를 타다 주고 화를 풀어줘야겠다. 미리 물을 끓이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커피 한 잔을 채워서 대령을 한다. 그런데 아직 라면 먹기가 끝이 나지 않았구먼. 이럴 땐 나만의 약이 있지. 약발이 잘 들어야 할 터인데. 영감은 시방 화가 많이 나 있는데, 참을 성을 시험하 듯 꾹꾹 참고 있는 게 손바닥 펴보이 듯 이 한눈에 보이니까 말씀이야.
나는 영감이 돌아보기를 기대하며,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말한다.
“에구. 아직 다 안 자셨네, 내가 먼저 마셔야지.”
다른 때 같았으면 올려다보며 씩~ 웃을 터인데 고개도 들지 않는다. 아직 약발이 안 먹혔다는 게다. 속으로는 그럴 만 했다 하면서도 나는 내색을 않는다.
나는 가끔 아니 자주, 영감이 마시는 커피를 한 모금씩 빼앗아 마신다. 영감이 싫지 않은 내색을 하곤 했기 때문에 그게 습관이 돼 있다. 영감도 마시다가 한 모금씩 남겨서 건네주기도 한다. 주치의가 커피를 마시지 말라 하는 소리를 영감도 직접 들었으니 양심이 있는 게지. 커피를 몹시도 좋아하는 내 앞에서, 향을 풍기며 커피를 마신다는 건 반 범죄 행위걸랑.
커피를 마시는 나를 올려다보던 영감이, ‘못 말려~’ 하는 듯이, 혀를 차며 피식 웃어 보인다. 이젠 됐다. 영감이 비록 소리 없는 웃음이지만 웃음을 보였다는 것은, 화가 풀렸다는 뜻이다.
앞으로는 라면을 끓여서 먹든 볶아서 먹든 상관을 않겠다. 라면을 끓일 때면, 차라리 내 것도 같이 끓여 달라 청해서 함께 먹어야겠다. 영감은 아마 흔쾌히, ‘그러마’ 하고 끓여줄걸?!
아리조나주의 그랜드케니언에서 해돋이를 마주하고 섰는 영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