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았다 말았네
산행에서 돌아오니 5시 30분. 저녁밥을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데, 땀이 난 김에 샤워를 먼저 하고 싶어졌다. 샤워를 하고나면 저녁밥이 많이 늦어질 것 같아서, 어제 막내 딸아이가 전주에서 오는 길에 사다가 놓고 간 ‘수제파이’를 영감에게 건넸다. 저녁이 늦을 것이라는 예고를 한 셈이다.
몸이 젖은 김에 아예 화장실 청소를 하고 싶어졌다. 이곳저곳을 문질러 닦고 나니 저녁은 점점 늦어지게 생겼다. 영감을 불러 돌솥에 밥을 좀 안치라고 해 봐봐? 들어줄까? 가끔은 내가 자리를 비우면 영감은 곧잘 밥을 해 먹더라는 말씀이야.
그런데 차마 쉽게 입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그이도 같이 산행을 했으니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일 테니까. ‘말을 해봐?’, ‘말어?’.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피~. 이럴 땐 만석이도 별 수 없구먼.’ 혼자 소설을 쓰다가 포기하고 만다.
어~라. 그런데 주방에서 소리가 난다. 이건 돌솥을 움직이는 소리가 아닌가. 돌솥은 그 움직임이 별다르걸랑. 아마 영감이 밥을 안치는 모양이다. 화장실 벽을 문지르는 내 손이 가벼워진다. 신이 난 게다. 어떻게 영감은 내 마음을 읽었을까. 신통하기도 하다.
청소를 마치고 주방으로 나선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돌솥은 주방의 개수대에서 물만 잔뜩 머금은 채로다. 누룽지만 긁어진 채 돌솥은 개수대에 앉아 있다. 이건 내가 그린 그림이 아닌데. 그러니까 물에 불리워진 돌솥을 지금부터 닦아서 밥을 지어야 한다는 게다.
심통이 난다. 그렇다고 어디에다 푸악을 떨 상대도 없다. 입을 앙다물고 거칠게 손을 놀려 솥을 닦고 저녁을 안친다. 이렇게 심사가 사나울 땐 말을 줄여야한다. 입을 잘 못 놀리다가는 다툼이 되걸랑. 용솟음치는 심통을 꾹꾹 누르며 저녁을 지어 먹는다.
그래도 한마디는 해야겠다. 내가 시방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아량으로 고운(?)소리를 낸다.
“아빠. 이런 날은 아빠가 쌀을 좀 안쳐서 밥을 지었으면 어떨까? 그러면 내가 상만 챙기면 저녁이 안 늦을 걸.”기왕이면 눈웃음도 치면서, 코맹맹이 소리도 좀 섞어서 말이지.
별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영감이 내 눈을 들여다본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이윽고,
“그러려구 솥에 누룽지 긁어 물에 담궈 놨잖아.”한다. 그러니까 밥을 하려고 했는데, 내가 나왔다는 말이렸다?! 오~. 그러고 보니 거짓말은 아니네?! 내가 그럼 좀 일찍 나왔다는 거야?
여자의 마음은 참 별 거 아닌 거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만약에 영감이,
“이 여자 점점 하는 소리 좀 보소. 이젠 밥까지 시켜먹으려고?” 했더라면 나는 득달같이,
“밥을 좀 하면 안되욧!”했겠지.
휴~. 오늘의 전쟁은 그래서 일보직전에 촉발을 면했다. 그런데 다음엔 정말 영감이 밥을 할까? 좀 늦은 시각까지 시간을 끌어 봐봐? 오랜만에 영감이 지어주는 밥을 먹어 봐봐? 오늘 만석이는 혼자서 소설을 쓰고 지웠지만, 그래도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음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