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어느 날. MBC라디오의 정오 프로그램에 글을 올렸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채택이 되어 30만원 상당의 문화상품권과 야외용 압력밥솥과 요플레를 받았습니다. 바빠서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우선 방송 되었던 사연을 올립니다. 축하 해 주세요.)
봄날(지하실 방 할머니의 봄날)
할머니는 우리 집 지하실 방을 둘러보고 가신 지 이틀 만에 짐을 들고 오셨습니다.
“아이구. 할머니 계약도 안했는데 이렇게 오셨어요?”하니,
“계약은 무신 계약이여. 돈만 내면 되제.”하셨습니다. 그래도 계약서를 써야한다 하니,
“일 없어. 돈이나 받아요. 영수증이나 하나 써 주든지.”하시며 곱게 웃으셨습니다.
이렇게 한 지붕 아래 내 집 가족이 되신 할머니의 이삿짐은, 달랑 쇼핑빽 두 개가 전부였습니다. 허리는 좀 굽으셨지만 하얀 피부와 입매가 예뻤고, 얼굴엔 늘 잔잔한 웃음을 짓고 계셨으며, 깔끔한 옷매무새로 정갈한 할머니셨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이웃들마다 걱정을 했습니다.
“저렇게 혼자 사는 양반을 두었다가 무슨 일을 보려구. 늙은이는 ‘밤새 안녕’이래잖아.”
아닌 게 아니라 그러고 보니 걱정은 됐습니다. 할머니는 곱기는 했지만 80세는 족히 넘어 보이셨습니다. 혹시 간밤에 무슨 일이나 없으셨나 하고, 공연히 두부찌개도 들고 내려가고, 된장국도 덜어서 들고 내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주방기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어떻게 진지를 해 잡수세요?”
“경로당에서 밥은 먹어.”
저 너머의 경로당에서 점심을 자시고, 저녁밥은 얻어서 들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아침밥은 거르는 게 버릇이 되어서, 먹으면 오히려 속이 거북하다고도 하셨습니다. 폐지를 주어 생활을 하셨는데, 고맙게도 동사무소에서 생활보조금을 주어서 그럭저럭 산다고 하셨습니다. 들여다보는 이가 아무도 없어서, 이웃들이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이 아침에 출근을 하고나면, 나는 밥을 같이 먹자고 할머니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한사코 거절을 하셨습니다. 너무나 완강하셔서, 아침은 챙겨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녁에 새로 지은 밥과 된장국이라도 퍼 들고 내려가면, 할머니는 오히려 역정을 내시며,
“내가 이렇게 살아도 아직 남들한테 폐를 끼치는 짓은 안 하고 삽니다요.”하셨습니다.
그렇게 깔끔하신 할머니가 차츰 이상해지셨습니다. 혹시라도 경로당에서 밥을 얻지 못하시면 들어오시라고 대문 열쇠를 드렸었는데, 문이 안 열린다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시고, 기척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거실에 누워계시기도 했습니다. 또 이방 저방의 문을 열고 살피며,
“커피도 한잔 안 줘?”하기도 하셨습니다. 별스런 일은 아니지만 이제껏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묻지도 않는 말에, 소시 적 이야기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열여덟 살에 시집을 갔지. 신랑은 스물 둘이었고.”
“날을 잡아 놓고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장사 지내고 열흘 만에 잔치를 했어.”
“그런데 시집이라고 와서는, 어린 시누이를 업고 마냥 뛰어다닌 겨. 내가 다 길렀어.”
할머니는 잔잔하게 웃으며 남의 이야기를 하듯 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순서도 없고 차례도 없어서 잘 새겨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내가 엮어서 이해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조용조용한 어조로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시는 할머니의 눈은 먼 시간을 더듬고 계셨습니다. 베란다쪽의 높은 하늘에서 누군가를 찾는 것 같기도 하고, 반겨 맞아들이는 시늉도 하셨습니다.
“큰시동생이 열 살이구, 작은 시동생은 다섯 살이고, 시누이는 세 살이더라구 .”
“부모님이 시집을 가라고 하니께 시집은 갔는데, 신랑 얼굴도 사흘 만에야 살째기 훔쳐봤지.”
“할머니도 참. 훔쳐보지 않으시면 누가 뭐라 해요? 호호호.”
“그 시절엔 다 그랬어. 중매가 들어오니께, 시집을 가야 하는갑다 하고 살았지.”
“그래 영감님은 맘에 드셨어요?”
“응. 아주 잘생기고 맘이 좋은 사람이었어. 시댁사람들도 다 좋았고.”
할머니는 시방 시댁 마당에 서 계신 듯했습니다. 할머니의 눈이 반짝하고 빛을 냈습니다.
“그래서요?” 나도 할머니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잔치를 하고 열이틀 만에 신랑이 군대를 간다잖어.”
“어머. 어떻케 해요.”나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할머니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습니다.
“어려두 신랑이라고 나를 뒤에서 요렇게 두 팔로 보듬어 주면서, ‘장모님도 돌아가셨는데 나까지 떠나서 미안해요’하더라구.” 할머니는 두 팔을 감싸 안으며 실눈을 만들어 웃으셨습니다.
“그려두 서운한 것두 몰르구, 시누이랑 시동생들이랑 막 뛰어 다님시롱 놀았어.”
“….”
“면회를 가면서두 난 안 델부고 가더라고. 엄니 아부지만 가시더라니께.”
“그래도 그냥 그렇게 사는 건 줄 알고 시집 사람들이랑 그냥 그렇게 살았어.”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삼년 지나고 그 봄날에 돌아온다고 했어.”
“옛날엔 군대복무가 길었는데….”
“휴가를 나와서는, ‘조금만 고생하고 있으면 내가 와서 잘 해줄게요.’하더라고.”
“그래서 그해 봄날에 돌아오셨어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나는 다그쳐 물었습니다.
“아직도 안 왔어. 봄날에 온다고 혔는디….”
그 뒤로 할머니는 재혼을 하시고 딸을 하나 두었으나, 두 번째 남편은 결핵을 앓다가 숨지고, 딸은 세상을 버려서 할머니는 쭉 혼자 사셨다고 했습니다.
“봄날에 온다고 했다니까.”묻지도 않았지만, 할머니는 혼자말로 아주 예쁘게 웃곤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신랑은 6.25전쟁에 입대해서, 전사(戰死)를 하셨던가 봅니다.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모두 그저 그렇게 사는 건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사셨다고 하지만, 어린 신랑은 고운 새댁을 집에 두고 어떻게 군 생활을 했을까요. 그리고 예쁜 새색시가 눈에 밟혀서 어떻게 숨을 거두었을까요. 그 저녁에 나는 남편에게 할머니의 과거를 전하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아! 드디어 이웃들이 걱정하던 일이 생겼습니다. 할머니에게 치매가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급기야 할머니의 머릿속에는 그동안의 삶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봄날’만 남아 있었습니다. 집을 잃어버려서 찾아 나서기도 여러 차례. 내가 누구인지도 몰라보고 밥을 달라고 떼를 쓰고는 하셨습니다. 밥이 없어서 라면을 끓이면, 밥을 달라고 내 등짝을 때리기도 하셨습니다.
나는 견디다 못해 방 보증금으로, 모질게도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더 보살펴드리지 못한 것이 죄스러워, 가끔 남편과 같이 할머니를 찾아갔습니다. 할머니는 늘 ‘봄날’을 중얼거린다고 요양원의 직원들이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신랑이 곁을 떠났던 날의 ‘봄날’에 대한 약속만을 기억하고, 그 뒤의 일은 깡그리 잊고 사시는 모양이었습니다.
나는 봄이 오면 지하실의 할머니를 생각하곤 합니다. ‘할머니의 봄날’은 우리가 듣기에는 아주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봄날’이야기를 하시며 곱게 웃으시던 할머니에게는, 분명히 ‘행복한 봄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쯤 할머니는 하늘나라에서 할아버지를 만나, ‘행복한 봄날’을 보내고 계실까요? 그랬으면 참 좋겠습니다.
보림아~!
보림이가 아주 어릴 적이라 그 할머니 생각이 안 날 겨.
널 아주 이뻐하시다가 병이 나니께, 너도 못 알아 보시더만 ㅉ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