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동도 트지 않은 좁은 논길
넘실넘실 양동이 가득 물을 이고
대문도 없는 흙마당을 들어서는 여인
정지 구석에 큰 물항아리는
언제나 물이 가득 찰까
정지 문을 열면 비 올때마다
뒤안에서 내려오는 물 도랑이 있고
그 건너 태고적부터 쌓여 생긴
바위를 편평하게 해서 만든
엄마의 장독대
그 장독대 틈새로 계절마다
채송화 봉숭아 코스모스
소담스레 피어나고는 했네
크고 작은 독에는 해마다
가실이 끝나면 고추장이 담겼고
날씨가 차지면 끝물 고추를 따다
소금에 절여 돌을 얹었으며
정월이면 독 가득 소금물을 붓고
메주를 띄웠고
철마다 새우며 황실이
밴댕이며 풀치가 소금에 절여져
한 자리씩 차지해 익어갔어
뚜껑은 뚜껑대로 봄이면 토실토실
살찐 고사리와 취가 데쳐져 말려졌다가
정월 보름밤이면 맑게 익은 굴비와 함께
나무소반에 담겨 맨들한 독 위에 놓여졌고
펑펑 흰눈이 내려 소복이 쌓일 때면
어느 부잣집인들 저리가라
마음이 넉넉해지기도 했지
그러다 어쩌다가
어째 그러요 어째 그러요
얼근히 취한 해가 비틀대며 서산 넘다
아버지와 나란히 집안을 들어서면
시커먼 장물이 마당을 덮어가는 날도 있었어
그 짜고 검은 물이 우리를 물들일 때
꿈은 그저 잠속에서나
켜지는 흑백 테레비만 같았지
그런 밤에는 장독마다
달빛이 내려와 핏기없는 손으로
어루만져주기도 하고 뒷산의 새들은
숨 죽이고 잠자리를 펴고는 했어
평생 원망을 쏟아낼 곳 없는
아버지에게 터지고 깨져도
가장 만만한 세상이 되어준
엄마와 엄마의 장독대
그렇게 태풍이 한번씩 휩쓸고
지나가도 여전히 장들은 잘 익어
날마다 식구들을 먹여 살렸네
이른 새벽마다 신의 얼굴인 듯
항아리를 닦고 볕 좋은 날이면
뚜껑을 열어두고 논밭으로 나가며
비오면 덮으라 당부하시던
젊은 엄마의 음성 귀에 선하고
아, 친구들과 공기놀이에 정신을 팔아
장에 빗물이 들어가 혼난 적이 몇번이며
숨바꼭질하다 깨어진 항아리에
눈물 방울 떨어진 적 몇번이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장독대 옆
동갑내기 감나무 베어진지 오래고
작은 항아리 하나 없이
바람만 스쳐갈 뿐 지쳐
떨어진 나뭇잎만 뒹굴다 가고
뒷산의 새들 오늘밤은 그리움으로
잠 못들고 밤새 뒤척이겠네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