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모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출처: 민음사 [김수영전집]
풀 / 시쓰는 사람 단
끝이 없는 일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줌 풀을 뽑고 나면
보이지 않은 곳에선
또 한 줌 풀이 자라고 있었다
눈앞에선 말끔하게 정돈된 삶이
등 뒤에선 제멋대로 갈라지고 있었다
억울하여 낫을 들고 후려치면
뿌리가 살아 억세게 올라오고
죽을 힘 다해 뿌리까지 뽑아내면
또 봄이 되어 새로운 씨앗이 싹텄다
애써 무관심해져 무성하게 키워 놓으면
풀의 독성에 시름시름 앓았다
풀엔 나비가 없다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호림이 없다
나풀나풀 날아가는 나비처럼 살고 싶은데
나비는 풀잎에 날개 벨까 두려워 오지 않았다
독침을 품고 윙윙거리는 벌도 볼 수 없다
벌을 꼬드기는 달콤한 재료가 없어
강하게 한 방 얻어맞고 혼미해질 기회가 없다
그리하여 풀과 함께 살면 외로웠다
풀은 독한 생명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그 본성에 손을 대면 더욱 질겨진다
풀을 제거하려는 안일한 행동은
눈앞에 있는 건 사라지게 하지만
시선 밖에 존재하는 것에겐
더욱 질기게 사는 법을 제공한다
이리하여 죽었던 풀은 다시 살고
삐죽삐죽 올라서는 무성한 풀을 보며
그 기막힌 생명력에 눌려
시름시름 눕혀졌다
실상 풀은 나였을 것이다
보기 싫은 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죽이고자 했지만
그래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눈감고 싶은 내 모습이
눈 뜬 내 앞에 나타나면
그 낯섦에 죽이고자 덤벼들었지만
못할 일을 해 가며
목숨 부지하는 낯짝에 서글퍼하며
연명(延命)해 왔던 것이다
*출처: 북센 [우리는 사람이다]
'풀'이란 동일한 제목의 시를 함께 올려봅니다.
똑같은 이름으로 살아가도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처럼, 시도 동일한 제목이지만, 그 느낌이 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