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차별을 모른다
죽을 자리를 마련해 놓고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다음 장을 펼쳐보기 전에, 내가 묻힐 자리를 먼저 봐둔 이유는
무기력한 시간을 연장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풀죽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독을 품은 적이 더 많았다, 다만
품었던 독만큼 인생은 아름다워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도 사랑했을 것이다
때때로 단단히 나를 붙잡아 주었던 그 애착에 감사한다
내가 묻힐 곳은 흔한 자리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지점에 위치해 있고
묘비도 봉분도 풋풋한 풀도 없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묻힌 곳을 편하게 밟고 지나갈 것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들에겐 이런 속삭임이 들릴 것이다
사랑했던가
더 사랑할 수는 없었던가
얻고자했던가
차라리 버릴 수는 없었던가
후회하는가
시간을 뒤로만 넘겨왔던가
부족해도 넘쳐도 상관없다, 결국
그 모든 것은 죽음과 연결되며
묻히고 나면
별 신경 쓸 필요 없는
사소한 것이 대부분이다
죽음에 묻히고 나면 삶은 편하다
죽음은 차별을 모른다
죽을 자리를 마련해 놓고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결론의 싱거움을 알고, 미리 삶의 부담을 내려놓고자 했다
*시집[일기 속에 일기] 2013년 tstore, e-book, <시 쓰는 사람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