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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사랑을 위하여(박일문 시집)


BY 이순연 2000-09-23


사랑을 위하여

간 밤 내내 거리를 걷다가
아침 일찍 문을 연 다원에서
차를 마십니다.

조간신문을 사서
구석 구석을 뒤져보아도
활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신문은 백지 인 채로
머리속도 백지 인 채로
세계는 텅빈 듯 합니다.
옷에 묻은 간 밤의 술 냄새.
차향으로도 지우지 못하고.

무엇이 나의 나날을 이렇게 흔들어 놓았는지.
무엇이 나의 나날을 이렇게 허허롭게 했는지.
누구에게서도 위로받을 수 없는 그런 고통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지만.

당신을 사랑하고 내 뼈와 살은
어디로 다 사라져버렸는지.
그 사랑 얼마나 무거워서
그 사랑 사라지고
내 몸은 왜 이리도 가벼운 것인지.

회상은 견딜 수 없는 공포.
내 생애에서 전체를 차지하였던
단 하나의 의미.
그 사랑 사라졌으므로
내 신발은 늘
묘지 쪽으로 향해 있는 듯 합니다.
둘러보아도 꿈 없는 나날들.

그 사랑 이승에서 놓칠 수 없었는데.
그 사랑 우리는 곱게도 미쳐갔는데.
그 사랑 누가 데려갔는지

--하지만 살아야 한다는 것 압니다.
눈을 뜨면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수천 수만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기록하고 보존하고 물려주고 나누어 가지며
문명과 문화와 역사.
저마다의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의 희망을 생각하고 당신을 생각하면
감동스러운 것이 울컥거리며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거리의 햇살이 내 얼굴로 쏟아집니다.
쏟아지는 햇살. 그 사랑.
여러 모습으로 너울거리며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나는 찻잔을 물리며 신문을 접습니다.
그리고 다원의 문을 엽니다.
우리는 못다한 일들
아직 지상에 남아 있으므로
나는 햇살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걸어 갑니다.


박일문님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
'사랑을 위하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