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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8-07

우울한 삼월이 시작되었다.

도서관 계단 양옆으로 울타리 치듯 빼곡히 서있는 개나리 나무 가지에
연두빛깔 작은 새싹이 막 움을 트고 있었다.
언제나 발끝만 내려다보며 하나 둘 계단을 세면서 오르내리느라 주변이 온통 개나리 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단수가 어느 날은 팔십 하나였다가 어떤 날은 또 칠십 구개였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루는 작정을 하고 계단을 오르면서 세어보고 다시 내려오면서 세었더니
정확한 개수는 팔십 일개였다.
칠십 구개로 착각한 것은 아마도 머릿속에 딴생각이 가득한 탓이었을 것이다.

이제 갓 신입생으로서 맞는 삼월의 셋째 주 주말,
여전히 나는 계단수를 세며 도서관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서른 몇 개쯤을 세다가 우연히 고개를 돌린 그 자리에 작은 새싹이 눈에 띄었고
아 봄이구나! 하는 덤덤한 느낌이 잠시 있었을 뿐,
나는 다시 계단을 올라 복도 끝 사물함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사물함 근처에 우리 과 여학생 서넛이 모여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 혜주 너 오후에 약속 없지? 우리랑 같이 어디 좀 가자.

한껏 들뜬 톤의 목소리는 내가 선약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한다는 투였다.

사실 말이 같은 과지 입학 후로 아직까지 한 번도 다른 학생들과 섞여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저 출석부를 때 건성으로 듣는 이름들 외에는 누가 우리 과 생인지 조차도 모르게 관심이
없었고 누가 누구라는 걸 굳이 인지할 생각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불쑥 다가온 여학생들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다.
주춤거리고 있는 나에게 여고동창인 순길이 다가와 내 팔짱을 끼며 앞장 섰다.
영문도 모른 체 끌려가다 시피 교문을 나와 우리는 길 건너 커피숍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화이트와 블랙 톤으로 치장된 실내장식이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다.
안쪽 깊숙한 곳에 통유리상자로 된 DJ박스가 보이고 양쪽에 우뚝 선 스피커앰프에선
Lobo의 I'd Love You To Want M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길이 앞장서가더니 DJ박스 바로 앞에 남학생 다섯이 앉아있는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제야 난 그자리가 미팅자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거기에 璡이 있었다.

다섯 남자의 틈바구니 속에 유독 앉은키가 멀대 같이 크고
두꺼운 안경을 서양인처럼 오뚝한 콧날에다 살짝 걸친,
하얀 피부에 숱 적은 반 곱슬머리의 남학생.
그리고 오렌지 빛 조명을 받아 불그레하게 번들거리는 이마,
수줍은 듯 입술을 오므리고 웃는
큰 키만 빼고는 전체적으로 연약해 보이는 그가 나와는 대각선의 위치에 앉아있었다.
이미 삼월 들어 두어 번의 미팅 경험이 있는 순길이 능숙하게 파트너 정하는 방법까지 제시했고 나는 얼결에 주머니를 뒤져 손에 잡히는 대로 하얀 팔찌묵주를 꺼내
남학생들이 보지 못하게 순길의 손아귀에 건네주었다.

璡의 가늘고 흰 손가락이 내 묵주를 집어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흡.
혹시나 누가 듣지나 않았을까 긴장하며 숨을 고르는데
璡이 묵주를 치켜들고 두리번거리며 주인을 찾았다.

- 혜주 당첨 !

순길이 한손으로 나를 지명하면서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璡을 지명하며 짝을 지어주었다.
그 순간 활짝 웃는 그의 오른쪽 송곳니 바로 옆에 삐죽이 내민 덧니가 클로즈업되듯이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