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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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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처럼 여울지다


BY 오틸리아 2022-08-06

처음엔 죽고 못살 것 같은 사랑이 때론 애증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 뒤통수를 후려치는 배신으로 치를 떨게 만드는 인연이 바로 악연이라는 것이다.  

璡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치를 떨게 한다는 표현을 처음으로 체험하게 만들어 준 희미한
기억속의 존재. 그저 한번쯤 아픈 사랑을 했던 기억으로 치부하기에는 후유증이 너무나 깊었다. 보상도 받지 못한 내 젊은 날은 달력의 마지막 장을 찢어내던 날마다 뿌지직 뿌지직 그렇게
잊혀져갔다.

璡의 앙상한 손을 맞잡는 순간 나는 해리성 기억장애를 앓다가 막 기억이 되살아난 것처럼
아, 내 지인들 중에 璡이라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새삼스런 지각반응을 일으켰다.
마주한 그의 얼굴에선 고단한 삶의 그늘이 느껴졌다.  
정수리 쪽으로 빗겨 넘긴 숱 적은 머리 털과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광활한 이마가 예나 지금이나 트레이드 마크처럼 느끼한 인상을 주었다.
스무살 시절에 처음 그를 만나던 날 커피숍 은은한 조명아래서 마주했던 그 느낌이 다시금 일렁이는 듯했다.  
몹쓸 기억, 몹쓸 오감이 되살아나는 것이 불쾌해서 얼른 술잔을 집어 들어붓듯이 원샷을 했다. 따끔거리는 편도를 어루만지고 넘어 가는 차가운 맥주가 청량제처럼 알싸했다.  

璡은 얼른 내 잔을 채웠다.
- 천천히 마시지,,,

걱정스런 표정과 말투마저도 싫었다.

- 나 술 엄청 많이 늘었어.

일부러라도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그 옛날 막걸리 한 잔에 정신을 잃고 교정 벤치에 누워
잠들던 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을까.
이제는 더이상 그의 등 따위는 필요 없는 강한 술꾼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까.

- 야, 야, 건배나 하고 마셔. 오늘은 혜주 취하는 모습 기어이 한 번 봐야겄다.

박선배가 건배잔을 드는 바람에 연거푸 두잔을 원샷하고 말았다. 위장이 싸아해지는 듯 하더니 이내 뱃속이 뜨거워졌다.

璡은 한동안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의 주름진 눈자위가 붉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술기운 때문인지 미묘한 슬픔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두꺼운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눈시울이 촉촉히 젖어 들고 있었다.  
내가 갓 새댁이 되어 이 도시로 내려왔을때 우연찮게 璡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 받아 중소기업의 사장이 되었다고 했다. 어린 나이의 출세가 많은 시련을 주었던 것일까.
지금의 행색으로 보아서는 그의 정체마저도 가늠키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의 등 뒤 쪽 벽에 존재감 없이 걸려 있는 감색 홑점퍼가 눈이 내리는 오늘 밤 입기에는
너무나 얇고도 초라했다.

몇 순배의 잔이 돌았는지 모르게 빈 술병들이 탁자 한 켠에 즐비하게 늘어섰다.
璡도 박선배도 반쯤 이성을 잃은 모습으로 진지하게 옛 추억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 누님, 혜주가요 대학생때 내 혼을 쏙 빼가버렸다니까요. 그때는 뭐 그리 좋았는지
묘한 매력에 빠져서 제가 헤어나지를 못했으니까,,,

璡은 혀가 마비된 듯 한 어눌한 발음으로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다소 들뜬 어조로 떠들어댔다. 바로 앞에서 불편해 하는 내 기색은 살피지도 않는지 자랑스럽지도 않는 과거지사를 줄줄
풀어내고 있었다.

- 그만 좀 하지, 다 지난 이야기는 뭐 하러 자꾸 끄집어내?

내 입에서 참다못한 짜증 섞인 말투가 튀어나왔다. 박선배는 우리의 지난 연애사가 몹시도
흥미로운 듯 헤죽헤죽 웃어가며 경청하고 있었다.

- 璡이 너는 혜주를 붙잡았어야 했어. 지금 후회하고 있지?

선배의 물음에 그는 아무 말 없이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열쩍은 미소와 함께 입술을 오므리는 그의 버릇이 나왔다.
말하기 곤란하거나 무언가 결정이 애매할 때면 늘상 해대는 그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한동안 골똘히 술잔을 들여다 보다 탁자위에 내려놓더니 미안했다는
과거형의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미안했어…….

누군가에게 이토록 허무한 사과를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겨우 네 음절의 사과가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영문도 모르는 박선배 앞에 자존심을 짓밟힌 듯 한 자괴감마저 들게 했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가 서로 등을 돌리고 떠나던 그날의 절망보다 더 치욕적으로 느껴졌다.

뭐가 그리 미안한데? 하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선배 앞에서 또 주저리주저리 쓸데없는 과거지사를 늘어놓을까봐 더 이상의 말을 잘랐다.

음식점을 나서자 팝콘 알만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느새 사방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상가의 간판 불빛만이 겨우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차를 가지고 귀가하기에는 틀렸고 그나마 택시도 보이지 않아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도로를 한참이나 걸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