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혼자가 아니었다. 고급 향수 냄새. 공기 중에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향수 냄새의 물결 아래에 또 다른 어떤 냄새가 물결을 이루며 흘렀다.
너무나 희미해서 무슨 냄새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내 침실은 완전히 캄캄했기 때문에 그림자의 그림자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도 없었다. 그림자를 볼 수 있다면 말이지만.
내 소음 기계에서 ‘쉬익’ 소리가 났다. 해변의 파도가 잔잔하게 부딪치는 소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악몽 때문에 잠을 자는 게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케일럽.”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나는 기다릴 거니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시트를 가슴 위로 끌어당기고는 두 팔로 폭 감싸 안았다. 부드러운 삼천 수짜리 이집트 산 면으로 만든 이 침대 시트가 지금 내게는 유일한 보호막이었다. 무척이나 얇고, 쉽게 찢어질 수 있긴 했지만.
딸각. 희미한 노란 불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면서 방을 희미하게 밝혔다. 통유리로 이루어진 벽은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그 옆에는 내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옆 한쪽 구석에는 루이 14세 스타일의 안락의자가 있는데, 바로 그 의자에 그가 앉아 있었다. 맞춤 제작한 검은 정장 바지. 주름 없이 빳빳한 하얀 셔츠, 2캐럿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커프스단추. 칼라의 단추는 풀려 있었다. 맨 위에 달린 딱 하나만.
늦은 시간이라고 해도 평소와 다른 편안한 차림이 놀라웠다. 매지 않은 넥타이는 한쪽에 가지런히 개어 있었다. 얇은 쪽 끝부분이 양복 재킷의 안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고, 재킷은 안락의자의 등받이 위에 걸쳐져 있었다.
그의 검은 두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깜박임마저 없는, 꿰뚫을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림이 없고, 차갑고, 생각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두 눈동자.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가 있었다. 경계심일까? 짐작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시트 내려.”
아. 그가 약간 흐릿한 발음으로 말했다. 시트를 내려놓았다. 흘러내린 시트가 허리에 닿았다. 차갑게 노려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의식하는 순간, 유두가 단단해졌다.
“옆으로 치워.”
한쪽 다리를 들어서 발로 시트를 밀어냈다. 비키니 라인의 붉은 실크 언더웨어가 드러났다.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규칙적으로 호흡을 하려고 애썼다.
심장이 고동치고 뱃속은 뒤틀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킬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 사람이지, 엑스?”
“당신 사람이죠, 케일럽.”
답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이것말고 다른 답은 존재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엑스?”
“나예요.”
하나, 둘, 셋. 그는 차례대로 단추를 풀어 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안락의자 등받이에 깔끔하게 접어 걸쳐 놓은 양복 재킷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구두는 한쪽으로 치웠다. 양말도 접어서 구두에 집어넣었다. 그다음에는 바지를 벗었다.
아주 천천히 지퍼를 내렸다. 지이이이익 소리를 듣는 이 순간은 고문이었다. 백화점 진열 상품처럼 정확하게 삼등분한 바지는 쿠션 위에 올려놓고, 탄력 있는 검은색 박서 브리프를 그 위에 올려놓을 때까지 그 모든 순간이.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감정을 표출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벌거벗은 그의 몸은 고전적 남성미의 전형이었다. 완벽한 조각상이었다.
탄력 넘치는 근육은 세심하고 정교하게 다듬어 놓은 것 같았다. 약간의 검은 털이 가슴 위에 적당히 모여 있었고, 평평한 배와 거대하게 일어서 있는 그의 성기 사이에도 길게 이어져 있었다.
보는 이를 달아오르게 하는 몸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정말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게 된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침대가 살짝 흔들렸다. 내 어깨 밑으로 흘러내린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을 그는 길고 굵은 손가락으로 쓸어 넘겼다.
그의 손톱은 깔끔히 손질되어 있었다. 내가 머리카락을 이렇게 늘어뜨리고 있는 경우는 오직 잠 잘 때뿐이었다. 그 외에는 시뇽 스타일로 둥글게 말아 올리거나 단정하게 땋은 다음 돌돌 말아서 핀으로 고정했다. 어깨 아래로 머리를 늘어뜨리는 경우는 절대 없었다. 여자의 목선은 적당히 노출될 때 가슴만큼이나 매혹적이고 에로틱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이런 거친 손길은 예상치 않은 일이었다.
놀라움에 숨이 거칠어졌다. 두렵지는 않았다. 두려움은 내게 가능하지 않으며, 허락되지도 않는 감정이었다. 감히 두려울 수조차 없었다. 하물며 두려움을 드러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입술이 뒤로 젖힌 내 목을 살짝 물더니 키스를 했다. 살짝 서투르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천천히, 진하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뺨으로 올라왔다. 시큼한 알코올 냄새가 섞인 그의 숨결이 내 얼굴을 감쌌다. 그의 손가락이 나의 깊은 곳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특히 지금 이 순간에는.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중요하지 않겠지.
잠깐 동안은 불편했지만, 그의 손가락은 이내 감각이 예민한 부분을 찾아 문지르기 시작했다. 금세 액체가 흘러나와 그곳을 매끄럽게 만들었다. 그때 거칠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칼라의 단추를 풀어 놓은 것도 그렇고, 술에 취해 밤늦게 갑자기 방문한 것도 그랬지만, 신음 소리를 내는 것도 평소와 다른 행동이었다.
그의 혀가 내 유두를 핥고 지나갔다. 이윽고 그의 단단한 성기가 부드러운 나의 몸 안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깊은 침투가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이루어졌다. 그의 입술이 내 뺨과 턱, 그리고 목과 가슴뼈를 애무하며 지나갔다. 나는 그의 체중에 눌려서 매트리스 속에 파묻혔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엉덩이를 잡고, 날씬한 그의 허리를 내 허벅지 사이로 깊이 밀어 넣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 될 것인지.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가 두 손으로 내 엉덩이를 잡고 반대로 돌렸다. 그러면서 엉덩이를 위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 했다. 그는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엉덩이를 잡았다. 뒤에서 뜨겁고 단단한 그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내가 완전히 축축하게 준비가 되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그의 굵고 단단한 성기를 내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거칠지도 않았고 오히려 약간 질척거리는 느낌이었다. 효율적이고 능수능란하게 속도를 조절하던 평소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그저 리듬이 약간 느려진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느긋하게 시작하다가 나중에 리듬을 올리고, 올리고, 또 올리려는 것이었다.
내 안에서 뜨겁게 퍼져나가는 열기에 저항할 수 없었다. 절정에 곧 도달할 것처럼 심장이 요란하게 고동쳤다. 하지만 아직 소리도, 감정도 보이면 안 되기에 주먹을 꽉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열기를 억누르는 데에만 집중했다.
이제 그의 속도는 가차 없이 빨라지고 있었다. 다시 평소의 거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능수능란했다. 내 몸은 그의 섹스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가 소유하고 쾌락을 즐기고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몸, 그게 바로 나였다.
내 의지는 상관없었다.
“자, 이제 됐어. 느껴도 돼. 지금이야. 당신 목소리를 들려줘.”
그는 거친 목소리를 내뱉었다. 낮았지만 단호했다.나는 마침내 목 깊은 곳에서부터 헐떡이는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절정에 이르자 뜨거운 열기가 온몸에 퍼지면서 불타올랐다.
모든 것이 끝나자 나는 비로소 침대 위로 쓰러질 수 있었다. 그가 사라졌다. 세면대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다시 나타나 내 등을 쿡 찌르며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건넸다.
“닦아.”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몸을 닦고 그에게 다시 수건을 건네준 다음, 몸을 돌려 내 자리에 누웠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온갖 감정들이 요란하게 파도치며 뒤죽박죽 섞이기 시
작했다. 오르가슴 이후에 찾아오는 나른한 졸음이 나를 수면 아래로 끌어내렸다.
가장 은밀하고도 비밀스러운 생각이 두려움, 욕망과 함께 깊은 곳에서 서로 거칠게 부대끼며 나를 혼돈의 바다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는 의식의 바다 표면에서 아주 깊숙한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