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후 고모는, 그녀의 걱정이 엉뚱한데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했는데 그것은 내가 대학 진학 대신 '수녀원'을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고모는 내가 나이에 맞지 않는 책을 너무 많이 읽는다며 '위인전' '세계 명작 시리즈' 외에는 책을 몽땅 고모부의 서재로 옯겨 놓고 <긍정 마인드로 사는 법>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 같은 책을 내 책상 위에 놓곤 하였지만 나는 고모부의 서재에서 몰래 책을 빼내어 목욕탕 욕조에 빨래판을 걸쳐 놓고 앉아서 러시아의 혁명에 얼고, 유럽의 단두대에 목이 얼얼하고 , 중국의 불가마에 가슴이 타는 소녀 시절을 보냈다. 자기 나이에 맞지 않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실, 비타민 과용과 같아서 오히려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는데, 책을 읽다가 애정 장면이 나오면 이것 때문에 고모가 그렇게 말렸나 싶어 뭉텅 건너뛰고 읽어, 지금도 명작들의 쌉싸르만하고 황금빛이 감도는 저녁 노을 느낌을 놓친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매일 밤 욕조 안에 쌓여가는 인간 욕망의 무서운 집착들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수녀원 안으로 숨어 들어가고자 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작자 미상의 <아우츠비츠의 이빨> 등은 나를, 세상의 꿈들과 떼어 놓기에 충분 했는데 , 내 또래 친구들의 장래 희망이, <현모양처> <선생님 > <의사>들이었을 때 나는 세상을 멀리한, <갈멜 수도원의 수녀> 였다. 그러나 고모가 울고 불고하며 소개해 준 수녀원의 원장 수녀님은 ' 세상에서 잘 적응하는 사람이 수녀원 생활도 견딜 수 있다'고 하시며 '믿음, 순명, 청빈'(*수녀원의 모토) 은 훗날을 기약하고 내게 퇴짜를 놓았다. 앞 집 오빠가 또한, 내 생각을 바꾸어 보겠다고 나서자 마음이 얼락배락해진 고모는 오빠가 나를 앞 뒤가 훤한 정자 나무 위에서만 만나는 것을 허락했는데 라일락이 타고 오르는 정자 기둥에 서서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것 만으로도 고모의 '근본' 철학은 초라해져 갔다. 고모는 최류탄 냄새와 뒤섞인 라일락을 쥐어 뜯으며 '근본'과 '순명'의 대결을 지켜 보아야만 했는데 해결은 뜻밖의 곳에서 찾아 왔다. 그것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학교 옥상 위에서, 백주 거리에서,군대에서 ,집에서 사라지더니 앞 집 대학생도 어느 날 홀연히 없어졌다. 내가 그 학교에 입학하여 들은 바로는' 문 지성 '졸업반 학생은 학사모 대신 명예 졸업(*그당시 감옥에 가는 것)을 택하고, <시국 선언문>을 낭독하기로 한 전날 , 학교의 <지성의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응급차에 실려 간 후, 다시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친구들이 그를 찾아 헤매던 그날 밤, 정숙 아줌마는 비밀을 지켜 달라며 " 정신이 산란한 돈 많은 여자들이나 검찰 출두 직전, 쓰러지는 몸을 가진 돈과 세력을 가진 남자들만이 입원 할 수 있는 곳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