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점심 때'투나 찹드 샐러드'를 먹은 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 3S >에 들러 먹을 것을 사서 올라갈까'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내가 왜 이 남자와 이곳까지 왔는지도 가늠을 하지 못하면서 마주 앉아 무엇을 먹겠다니/ 나 자신도 어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지금 무엇을 하려는걸까 ?
그 옛날, 지금 이 남자와 나는 밥을 같이 먹곤 했다. 안국동 고모 엄마네 집은 대문을 들어서면 디귿자 건물이 꽤 넓은 정원을 안고 있었다. 고모부는 그 정원 가운데에 직접 나무를 대패질하여 정자를 만들었는데 고모는 대청으로 흘러 들어오는 햇볕을 막는다고 반대를 하셨다. 하지만 내가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정자 마루 위에 앉아,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 나는 이 집의 외동딸 한 혜현이어요. 우리 엄마는 선생님이고 우리 아빠는 오토바이를 잘 타시고 방송국에 다니세요. 혹 홀쭉이와 뚱뚱이를 보시고 싶으시면 우리 아빠께 부탁해 볼께요" 라고 말하며 온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드는 일이 많아지자, 아예 정자 둘레에 모기장을 쳐주고, 글씨를 몰라 애고대고하며 찾아오는 할머니, 아줌마들에게 식혜를 만들어 주려고 하루 종일 밥풀 쉰 냄새를 풍기며 주일 날의 단잠을 정자 기둥에 찧곤 했다. 식혜의 밥풀이 적당히 삭았는지 살피는 것은 우리와 대문을 마주한 '김 정자' 아줌마가 할 일이었는데, 아줌마는 고모와 한 동네 친구였으며 무엇보다 배 밑바닥에서 입을 틀어 막고 거제 앞바다를 건너 3.8 선을 같이 넘어 온 생사고락의 공유자라고 했다. 그 아줌마의 아들은 나보다 5살이 많아 종종 나의 과외 선생이 되어 주기도 하였고 정자 위에서 뛰어 내리면 재빨리 받아내어 공중에 붕 띄우며 바람개비를 만들어 어질어질해진 내가 오빠의 등에 기대어 눈을 꼭 감고 하나 둘 셋.. 서른을 셀 때까지 서 있어 주곤 하였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오빠가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골목길에서 만나 같이 들어온 날 정자 아줌마가 '참 보기 좋다' 했는데 고모가 불같이 화를 내며 '다시는 우리 집에 들락거리지 말라고' 정자 아줌마를 문 밖으로 밀어내며, 나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 앞 집의 오빠와는 거리를 두라고 했다. 앞 집 오빠는 누구나 다 부러워하는 대학에 다니고, 잘생겨, '소개 좀 부탁한다'는 여학생들이 종이학 유리병을 들고 우리 집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기도 했는데, 고모는 '근본이 다른 앞 집 오빠와 어울려서는 안된다고' 내게 말했다. 내가 '근본이 다른 것이무엇이냐' 묻자 고모가 알고 있는 근본에 대한 사연이 줄줄이 나왔다. 정자 아줌마가 남한으로 피난 나온 후, 입 하나 덜라고 만난 남자는 나이는 좀 많았지만 그 남자가 동네에 나서면 누구나 인사를 하며 슬금 슬금 피하는, 경찰보다 세력이 큰 그 무엇인 줄만 알았는데, ' 자기에게는 빨갱이 잡는데는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어있고 황국신민의 장교로 만주 벌판을 누비다가 해방이 되자 뜻한 바 있어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동경 제국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 조국이 다시 자기를 필요로 하여 어쩔 수 없이 들어와 반공 청년단의 단장으로서 빨갱이들을 색출했는데 길을 나서면 빨갱이 여편네들과 아이 새끼들이 바지 가랑이에 매달려 걷어차기 바빴으며, 파출소 습격에 가담한 사촌들도 가차 없이 왼쪽으로 보낼 만큼 엄격했다' 하며 벽에 걸어둔 일본 환도를 빼내 빙빙 돌리다가 정자 아줌마의 옷 고름을 풀었다고 한다. 정자 아줌마의 아들이 국민학교 3학년 때, '남파 간첩 김신조가 세검정까지 올 수 있었다'는 뉴스를 들은 남편은 ' 북한이 다시 쳐들어오면 자기가 처단 대상 1호 명단에 있을 것'이라며 며칠을 방에서 안 나오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얼마 후, 버팔로 우표가 덕지덕지 붙은 노란 봉투가 도착했는데 미국 교포 여자와 위장 결혼을 해야하니 이혼 도장을 찍어 달라는 내용과 함께 벽에 걸린 일본 환도를 보내 달라는 추신이 붙어 있었다. 정자 아줌마는 조금 울더니 집이 아줌마 소유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신나서, 도장에 지장까지, 꽉꽉 새빨갛게 눌러 보냈다고 한다. 고모는 '친구 정자의 인생이 불쌍하여 돌봐주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너도 어린애가 아니니, 일제 때 일송 김 동삼 장군을 모시고 다녔던 독립군의 후예와 일제 앞잡이의 자식과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못을 박았지만 ,그때 나는,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만나지 말아야 할 하이에나의 골짜기'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었다. 난 인생은 약간은 쓸쓸하여도, 그 당시 유행하였던 Susan의 < Evergreen>(*URL Youtube)처럼 푸르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