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는 그 행위를 진지하게 치러낸다. 들이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다.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띄운다. 그러더니 쥐고 있던 손목을 놓아준다.
“뭐한 거야?”
“니 느낌을 내 안에 담았어.”
들이 뚫어지게 뫼를 쳐다본다. 뫼는 덤덤하게 마주 바라볼 수가 없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다. 눈을 살짝 내리뜨고 있다. 들이 먼저 시선을 돌린다. 들도 아직은 멋쩍다. 그러나 싫지는 않다.
“놈들이 돌아올 시간이야. 놈이 좀 당황할 걸?”
“왜?”
“소리 통로를 막았거든.”
“정말?”
들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어색함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놈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인터넷을 쌀쌀 뒤졌어. 정보가 끝이 없다고 했잖아. 힘은 들었지만 찾아냈어. 뿌듯해. 놈들이 밥 먹으러 때맞춰 나가줘서 가능했어. 애니 그놈이 따라붙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
뫼가 활짝 갠 얼굴로 기지개를 켠다.
“놈의 아바타가 가만있었어?”
“명령이 있어야 움직여. 화가 나서 명령을 지운 듯해.”
“노림수일 수도 있어.”
들이 혹시 있을지 모르는 애니의 속마음을 일깨운다.
“그럴 지도 몰라. 놈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니까.”
말을 하고 뫼는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친다. 애니가 선심이나 쓰며 남을 배려할 그럴 사람은 절대 아니다. 어수룩한 인물도 아니다. 그런 애니가 자신을 풀어놓고 있다. 잠깐 사이에 사라졌다고 그렇게 싱겁게 돌아설 인물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미끼를 던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니는 뫼의 치밀함이 느슨하게 풀어지기를 느긋하게 기다린다. 아바타를 움직여도 도망갈 틈을 남겨둔다. 뫼는 그 틈새로 쏙쏙 빠져나가며 휘젓고 다니고 있다. 이를 악물고 좀 더 놔두기로 한다.
배도 두둑하게 채웠다. 슬슬 작업에 들어간다. 갑자기 애니의 눈동자가 휙 돌아간다. 소리통로가 먹통이 됐다. 잠깐 나갔다 왔을 뿐인데 막혔다. 뫼라 생각한다.
놈의 지능이 나날이 깨어나고 있어. 설마 했는데..
설마 하고 지나친 게 뼈저리게 아프다. 제 입으로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을 해놓고는 정작 자신이 설마 했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다.
그 뿐이 아니다. 뭔 생각에선지 뫼는 흔적까지 당당하게 남겨놓았다. 괘씸하다. 애니민 주제에. 하지만 그 말이 입에서 겉돌고 있다. 깔봐 봐야 돌아오는 건 뒤통수의 얼얼함뿐이다.
“훈!”
소훈을 부른다. 소훈이 뭔 일이냐고 묻는 표정으로 다가온다.
“이균에게 전화 걸어봐!”
“갑자기 왜?”
“놈도 찾고 있을 거야. 얼마나 진도를 나갔는지 알아봐야겠어. 노화 담당 유전자, 그걸 들먹일 정도면 다른 것도 조작할 수 있다는 뜻 아니야? 그것도 알아봐!”
애니가 말을 내던진다. 그리고는 다시 화면으로 머리를 들이박는다.
“소리가 왜 안 들려?”
“새끼가 막았어.”
“소리도 놓친 거네? 움직임은?”
“것도 몰라. 자꾸 물어대지 말고 전화해보라고?”
애니가 짜증을 팍 낸다. 화를 삭이지 못해 주먹을 불끈 쥐고 사무실 안을 서성인다. 소훈이 애니의 눈치를 보면서 이균에게 전화를 건다.
애니는 컴퓨터 앞으로 간다. 자판을 두드리는 게 아니라 두들겨대고 있다. 소훈이 그 소리를 피해 잠깐 밖으로 나간다.
“새끼,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겠다 이거지? 망할 자식.”
혼자 악을 써댄다. 소훈이 애니의 표정을 살피며 다가온다.
“조작은 어렵지 않은가봐. 한데 놈들을 손아귀에 넣어야 가능하다는데?”
“뭐가 이래? 놈의 머리를 따라갈 자가 없다더니 그 말 맞아?”
“왜?”
“그럼 손아귀에 있고 없고를 떠나서 해내야지? 내 말이 틀려?”
애꿎은 소훈이 분풀이를 당한다. 소훈이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애니를 쏘아본다. 너는 왜 못하는데, 라고 하고 싶은 걸 참는다.
“왜? 아니꼬워?”
“그럼? 새끼, 달콤하겠냐?”
소훈도 더는 참지 못하고 받아친다. 생각 같아서는 더한 말을 해주고 싶다. 비위가 틀린 걸 생각하면 더 험한 말을 쏟아내도 속이 풀릴 거 같지가 않다.
애니가 움찔한다. 잘 받아주다가도 한 번씩 뒤틀리면 치고 들어오는 소훈이다. 그때마다 움찔하는 게 버릇이 됐다.
“열 받았냐?”
“내가 만만하냐?”
“만만하긴? 너밖에 없으니까 그런 거지.”
애니가 한 발 뒤로 물러난다. 속은 부글부글 끓는다. 인터넷을 누비고 다니며 한 짓거리도 모자라 지금쯤 실컷 비웃고 있을 놈이다. 배알이 뒤틀린다. 소훈도 그런 애니의 맘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걸핏하면 짜증이다. 애니민만 아니면 한바탕해주고 떠났을 게 틀림없다.
“난 사람이야. 애니민이 아니야.”
“누가 너더러 애니민이래?”
소훈이 제 컴퓨터로 간다. 참자, 하고 마음을 다독인다. 어쨌거나 애니가 있어야 돈줄을 이을 수 있다. 돈뭉치도 가능하게 할 보물이 그의 머릿속에 있다. 그리 생각한다.
‘이젠 제멋대로 날뛰겠군.’
미끼를 물지 않는 여자, 미끼를 물고도 용케 빠져나간 애니민들. 답이 나오지 않는다.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온다. 뿔난 소훈은 말도 섞지 않으려는지 돌아보지도 않는다. 한 번 슬쩍 뒤돌아보고는 빠져나온다.
차의 시동을 걸고 미끄러지듯 도로를 달린다. 핸드폰을 꺼내 길안내 도우미에 지리정보를 입력한다. 하필이면 논산이야? 적어도 예닐곱 시간은 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