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 보내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보내봐야 소용이 없다. 여자는 열어보지도 않고 삭제해버린다. 여자의 카페를 공략하기로 한다. 읽기도 쓰기도 모두 정회원 이상에게만 허용하고 있다. 그냥 손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일단 회원가입부터 한다. 승인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여자는 쉬 승인을 해주지 않는다. 눈치를 챘는지 일절 대응을 하지 않는다. 냄새를 맡은 것인가? 코가 비상하게 발달한 모양이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다.
애니의 예상대로 이선은 만만치 않다. 며칠 사이 낯선 메일이 부쩍 눈에 띈다. 아이디는 다르지만 모두 한 곳에서 들어오고 있다. 놈들이라 생각한다. 띄엄띄엄 보내고 있지만 그 정도의 감은 그녀에게도 있다. 놈들이 아니라고 해도 낯선 메일은 열어보지 않고 스팸 처리하는 그녀다. 걸려들길 바라겠지만 그럼 너무 싱겁다. 망설이지 않고 역시 스팸 처리해버린다. 자신을 얕봐도 아주 얕보고 있다.
카페로 들어간다. 누군가 가입을 하고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가입을 허락하려다 얼른 손을 뗀다. 찜찜하다. 매일같이 날아들던 스팸메일이 생각난다. 그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끌어보기로 한다.
‘어쭈, 끈질기네? 존심은 버렸다 이거지? 한 번 모르는 척 속아줘? 그랬다가 뚫리는 건 시간문제겠지?’
이틀이 지나도 놈은 빠져나가지 않는다. 가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데도 버티고 있는 눈치다. 그녀는 글만 올리고 얼른 빠져나온다. 인터넷이 아무리 좋아도 10분을 머물지 못한다. 마음이 빨려 들어가지 않는다.
애니는 여자가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빠져나올 수가 없다. 여자의 컴퓨터부터 차단해야 한다. 한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해킹을 하려고 몇 번 시도해 봤지만 여자가 틈을 주지 않는다. 여자의 컴퓨터는 늘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다. 균을 퍼뜨릴 숙주가 없다. 게다가 그녀의 컴퓨터가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는 시간도 잠깐뿐이다. 뭔가 해보려고 시도를 해봐도 소용이 없다. 애니민들의 흔적을 따라가 봐도 마찬가지다. 여자에게 철저히 교육을 받은 모양이다. 좀처럼 말려들지 않는다. 한데 갑자기 뫼가 사이버세계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고 있다.
‘왜지?’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잡히는 게 없다.
‘빌어먹을 놈! 미꾸라지처럼 쏙쏙 빠져나가버린단 말이야.’
점점 약이 오른다. 여자와 애니민들이 한 통속이 되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포기하고 새로 제작하는 게 어때? 이균은 내가 다시 설득해 볼게. 돈을 밝히는 놈이니까 싫다고는 안 할 거 같은데..”
소훈이 며칠 벼르던 말을 꺼낸다. 애니가 멍하니 올려다본다. 시답잖은 녀석. 모르면 가만히 있던가. 뫼에게 들인 공을 몰라도 아주 모른다. 뫼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도 모른다. 주제에 끼어들어 참견하려는 게 꼴사납다.
“마음을 비운 거야? 아님, 다음 한 방을 노리는 거야?”
애니의 침묵에 입이 근질거린다. 애니의 대꾸가 고프다.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들여다봐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애니의 입이 중개를 해줘야만 겨우 가닥이라도 추릴 수 있다. 한데 애니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아깝긴 하지만 놈들의 저항이 너무 거세. 이미 모든 걸 알아채서 손에 넣는다 해도 쉽지 않아. 빠져나갈 생각으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킬 텐데 그걸 어찌 다 감당해. 너무 똑똑했어. 어지간한 유전자였어야지.”
소훈이 이유를 나열한다. 뭘 알고 하는 말은 아니다. 알고 있는 거 몇 가지를 바탕으로 끌어낸 느낌일 뿐이다.
애니는 얼굴을 찡그린다. 걸리적거린다. 소훈의 말이 귀에 거슬리기도 한다.
“말 같지 않은 소리. 놈들이어야 해. 다른 놈들은 버린다 해도 뫼는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만큼은 내 손에 넣어야 해. 그렇게 되기만 해봐. 꼭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거니까.” 애니가 짜증 섞인 소리를 한다. 가림막을 걷어낸 소훈은 애니의 짜증은 느끼지도 못한다. 애니가 뱉어낸 말을 주워들기에 바쁘다.
“놈에게 매달릴 게 뭐 있어? 니 머릿속에 고스란히 들어있는데. 그걸 꺼내면 뫼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냐?”
애니가 손놀림을 멈추고 소훈을 째려본다. 그 눈길이 싸늘하다. 소훈이 멈칫한다. 하지만 이미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망설일 게 없다.
“그러니까 제2 제3의 뫼를 만들자고. 그게 빠를 거 같은데? 더 매달리지 말고 이제 뫼는 놓아주자고? 그럼 가상세계 만 년의 공간에서 맴돌다 때가 되면 죽어 없어지지 않겠어?”
애니의 마음을 자극해보겠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인다. 한데 애니의 표정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진다. 아차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니가 보기에 내가 괜히 매달리는 거 같아? 뫼에게 내가 집착증이라도 보이는 거 같냐고?” 애니의 째려보는 서늘한 눈빛이 칼날처럼 파고든다. 움찔한다.
“놈이어야 해. 이빨이 바드득 갈려도 놈이어야 한다고. 놈이 내 손에 들어와야 그 다음을 노릴 수 있어. 놈을 풀어놓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말소리는 누그러졌지만 싸늘한 눈빛은 여전하다. 소훈은 그런 애니의 얼굴보다도 애니가 뱉어낸 말에 더 신경이 쓰인다.
“매달리는 거 맞네? 뫼를 놓아줄 수 없다는 거잖아. 뫼를 손에 넣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잖아.”
소훈이 애니를 꼬나본다. 돈 때문에 잡은 손이다. 돈 때문에 옆에 있는 거다. 한데 돈은 밀려나고 없다. 돈줄이 끊긴 곳에서 뫼와 숨박꼭질이나 하겠다고 제 입으로 말하고 있다. 여간 어줍잖은 게 아니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나고 있어. 사람들도 반 이상이 빠져나갔어. 돈 돌려달라는 사람들의 아우성도 여전하고. 더 시간을 끌다간 모두 떠나갈 거야. 그때 가서 뭘 어떻게 할 건데? 돌아오라고 애원할 거야? 마음이 다 떠난 사람들한테?”
내친 김에 할 말을 다 쏟아낸다. 쏟아내고 나니까 속이 후련하다. 더 쏟아내라고 하면 줄줄 쏟아낼 자신이 생긴다.
“애원할 것도 없어. 뫼만 손에 넣으면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지들이 무슨 수로 뫼를 외면해? 뫼가 수중에 들어오면 사람들은 저절로 모여들게 돼 있어. 더 근사한 놈들? 뫼가 없이 근사한 놈들은 없어. 봤잖아? 애니민들의 삶. 뫼가 있어서 새로운 사건들이 만들어지며 앞으로 나아갔잖아. 뫼만 있으면 모든 게 한 방에 해결 돼. 오감을 긁어대는 짜릿한 사건들이 줄을 서게 될 거야. 그러니 애니민들을 찾아내서 되돌려 놓기만 하면 그 다음은 술술 풀릴 거야. 떠난 사람들? 돌아오게 돼 있어. 애니메이션에 푹 전 놈들이 무슨 수로 그걸 끊어낼 수 있겠어.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게 어디 있다고. 걱정 마! 돌아올 테니까.”
애니의 목소리엔 자신감으로 똘똘 감싸여 있다. 뫼가 앞에 있기라도 한 듯 희심의 미소를 짓는다. 소훈은 점점 더 궁금해진다. 애니의 말뜻이 와 닿지가 않는다.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머리를 굴려도 풀리지가 않는다. 뫼가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것처럼 말을 늘어놓고 있는 애니가 낯설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냥 뫼가 대단한 애니민이라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도대체 뫼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은? 똑똑한 유전자니까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거지. 니가 말했잖아? 그 만한 머리가 없다고. 좀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고. 내 생각도 그래. 자료가 아무리 방대하면 뭘 해? 가상세계일 뿐인데. 현실에서 사람이 다가가지 않으면 흙더미 속에 묻힌 다이아몬드나 다를 봐가 없어. 땅속에선 다이아몬드도 흙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 가상세계도 그래. 하지만 이젠 달라질 거야. 애니민들이 터를 잡았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해서 뫼가 그곳에 있으니까. 놈이 가상세계를 누비고 다니게 되면, 가상세계도 더는 죽어있는 공간이 아니야. 진짜 생명체가 살아서 숨쉬는 공간이 될 거라고. 놈을 여기서 적절히 통제만 한다면 아주 근사하고 멋진 공간으로 탈바꿈 될 거야. 그럼 돈줄이 문제가 아니야. 줄에 매달린 돈뭉치를 차곡차곡 쌓기만 하면 돼. 그래서 놓아줄 수가 없어.” 애니가 제 말에 취해 씩 웃는다.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소훈도 애니의 자신감을 무시할 수가 없다. 괜히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애니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린다. 어지간한 유전자가 아니다.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고 해도 고개가 끄덕여질 머리다. 애니의 머리도 만만치 않다. 터무니없게 들리긴 해도 믿어볼 만은 하다. 더 몰아세우지 않고 물러난다. 자신의 컴퓨터로 돌아와 이것저것 눌러댄다.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다. 들어갔다 빠져나오기만을 되풀이 한다. 머릿속은 애니의 말이 천천히 맴돌고 있다. 애니가 가상세계에 풀어놓은 뫼도 애니의 말에 들러붙어 맴돈다. 뫼가 돈뭉치가 매달린 줄을 잡고 끊임없이 풀어내고 있다. 애니, 보통 머리가 아니다. 그의 머릿속은 보물들로 가득하다.
소훈을 떼어내고 나니까 홀가분하다. 바득바득 기어오르는 놈이 귀찮다. 하지만 멀리 밀어낼 수는 없다. 세상 쪽으론 그의 머리가 훨씬 크게 뚫려 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번 더 여자의 카페에 들어가 본다. 여자의 촉에 혀가 내둘러진다. 그대로다. 번번이 여자한테 밀려나고 있다. 정보기기에 빠삭한 자신이 글이나 끄적거리는 50대 아줌마한테 보기 좋게 밀려난다. 분풀이라도 하듯 손가락으로 터치패드만 두드려댄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다. 인터넷 탐색으로 들어간다. 손가락이 분주하다. 화면에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빼곡하다. 죽 훑어 내려가다 멈춘다.
느낌이 이상하다. 얼른 접속자들을 살핀다. 걸려들었다. 뫼가 들어와 있다. 그는 뫼의 움직임을 따른다.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한다. 애니메이션 작품을 보고 있는 중이다. 그의 시선이 뫼의 시선과 함께 움직인다. 마지막 자막이 화면을 지나간다. 뫼가 빠져나간다. 그는 얼른 자신의 아바타를 불러낸다. 그리고 뫼의 뒤를 따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