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하면서 들은 슬쩍 뫼의 눈치를 살핀다. 뫼의 입가에도 희미하게 미소가 떠 있다. 하지만 누리나 이든처럼 화사하지가 않다. 2013년에 빨려들어가지 않으려 버티고 있는 듯한 어정쩡한 미소다. 빠져들지 않도록 해달라고 주문이라도 외나 보다 생각한다. 그녀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뗀다. 하루만이다. 하루만 누리와 버들, 이든의 생각에 떠밀려가기로 한다.
“가자!”
다들 우르르 안으로 들어간다. 들이 뫼를 잡아끈다. 뫼가 어색하게 끌려온다. 하지만 돌아가는 판을 모를 그가 아니다. 들의 마음까지도 훤히 들여다보인다. 껄끄러움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머릿속에서 놈들의 말소리를 털어낸다. 얼마 전에 열어본 화면에 생각을 모은다. 컴퓨터 앞에 앉자마자 부지런히 손을 움직인다. 손이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거침없이 움직인다. 커서를 옮기고 마우스 왼쪽 단추를 눌러댄다.
“내가 아주 기특한 걸 보여주겠어!”
아예 으스대기까지 한다.
“어쭈? 어깨에 힘까지 팍팍 주고? 도대체 뭔데 그래?”
뫼의 으스댐에 누리가 호기심을 드러낸다.
“기다려! 내가 니들 눈이 동그래지도록 해줄게.”
뫼의 손놀림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화면이 확확 바뀐다. 한참 만에 뫼가 손놀림을 멈춘다. 갑자기 화면이 요란해진다.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격렬하게 몸을 놀리고 있다. 입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소리도 흘러나온다. 정말 다들 눈이 동그래진다. 뫼도 마찬가지다.
“이건 뭐야?”
“2013년의 현실?”
“응. 2013년 현실의 일부분이야. 한데 뭔지는 모르겠어.”
“그곳의 아이들인가 봐?”
다들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고 한마디씩 쏟아낸다. 뫼 말대로 눈동자가 점점 커진다.
“이거? 춤추면서 노래하고 있는 거야.”
누리가 잠자코 보고 있다가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던진다. 다들 누리를 바라본다. 어떻게 알았어, 하고 묻는 눈빛들이다.
“내 몸 안의 세포들이 그렇대.”
말을 하고 누리는 노래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모양새가 그럴 듯하다. 버들이 얼른 끼어든다. 누리의 몸놀림을 따라서 구슬땀을 흘리며 그녀도 열심히 몸을 흔들어댄다.
“니들도 해봐! 재밌어.”
누리가 몸을 흔들어대며 손짓을 한다. 이든이 멈칫거리는듯하더니 누리의 움직임을 눈치껏 따라한다. 아미도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뫼와 들만 끼어들지 못하고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다.
“뭐야? 해보라고? 재미있다니까?”
누리가 다시 손짓을 한다. 뫼와 들은 뒤로 몸을 빼낸다. 결국 누리가 와서 둘을 끌고 간다. 그가 들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댄다. 들이 엉거주춤 따라 한다.
뫼는 괜히 기분이 우울해진다. 이든이 그런 뫼를 끌어당겨 손을 억지로 움직이게 한다. 하지만 마음이 전혀 움직이질 않는다. 자꾸 들만 돌아본다.
들은 누리에게 붙들린 채 어색하게 몸을 놀리고 있다. 뫼의 눈길이 와 닿는 건 느끼지도 못한다. 누리의 억센 손에 두 손이 잡힌 채 끌려 다니기에 바쁘다. 그러더니 나중엔 웃음을 쏟아내기에 바쁘다.
뫼는 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머물러 떠나질 않는다. 도리질을 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왜 그래, 하고 털어내려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들의 웃음은 그의 마음에 달라붙을 뿐이다.
“그만 하자!”
뫼가 이든의 손을 뿌리치고 빠져나와 화면을 꺼버린다.
“왜? 내가 억지로 춤추게 해서 기분 나빴어?”
이든이 뫼의 눈치를 보며 묻는다. 뫼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찝찝한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다. 이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한데 상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 그런지 대꾸할 맘도 일지 않는다.
“왜?”
들이 다가와 그의 팔의 잡는다. 뫼가 벌떡 일어나더니 들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간다.
“왜 그러지?”
다들 서로를 보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주고받는다.
“억지로 춤추게 해서 그런가?”
“설마?”
“너무 열심히 일하다 보니 마음이 답답했던 거 아냐? 어쩜 그런 건지도 몰라. 바람 쐬고 오면 괜찮아질 거야. 그냥 놔두자!”
누리가 나름대로 정리를 한다.
“그런 거겠지?”
“그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뫼잖아.”
하지만 누리의 말과 달리 뫼는 언짢은 기분을 털어내지 못한다. 숲속을 누비고 다녀도 가시지를 않는다.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곰곰 생각을 더듬어 본다. 아무리 더듬어도 집히는 게 없다. 누리의 손에 끌려 어색하게 몸을 놀리던 들의 모습과 웃음소리만이 떠나질 않고 맴맴 돈다.
‘들 때문이야? 들이 왜?’
들을 떠올려본다. 기분이 다시 울적해진다. 그는 나무에서 내려와 한 시간 정도를 더 싸다니다가 돌아간다. 들의 눈길을 받아낼 자신이 없다. 못 본 척 침대로 가서 벌렁 드러눕는다.
서로 눈짓을 하더니 다들 제집으로 돌아간다. 뫼를 잠시 내버려두기로 한다.
다들 빠져나가고 나자 집이 텅 빈 것처럼 조용하다. 뫼는 일어나 화면으로 다가가서 이선의 카페에 들어간다. 이선이 카페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대화방으로 들어가 울적하다고 쓴다. 이선이 뒤따라 들어오더니 왜, 하고 묻는다. 그는 피식 웃는다. 참으로 신기하다. 혼자 그냥 써본 것뿐인데 이선이 참견을 한다. 한데 싫지가 않다.
“모르겠어요. 그냥 화면에서 나오는 노래에 맞춰 화면 속 애들을 따라서 춤을 추고 있었을 뿐이었거든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한데 괜히 기분이 언짢아지더라고요.”
“아이돌 그룹의 동영상을 본 모양이구나?”
“아이돌 그룹이요? 그게 뭔데요?”
“뭐긴? 니들이 본 화면 속 아이들이지. 함께 춤추며 노래하는 둘 이상의 아이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여기선 아이돌 그룹이라고 해.”
“예. 맞아요. 네 명이었나? 아니 다섯 명이었던 거 같아요.”
“한데 왜? 그 아이들이 맘에 안 들든?”
“아니요. 제가 먼저 보고 보자고 했는걸요? 좀 낯설긴 했지만 그런 건 없었어요. 황홀하기도 했고요.”
“그럼 뭐야?”
“들이 누리의 손에 끌려서 춤을 추는데 괜히 기분이 나빠지더라고요. 암만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까닭을 모르겠어요.”
“너 사랑하고 있구나?”
“사랑이요? 내가요? 그건 아녜요. 들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요?”
뫼가 아니라고 고개까지 흔들어대며 발뺌을 한다. 이선이 ㅎㅎ 웃는다.
“그게 바로 사랑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남자의 손에 끌려 춤추는데 기분 좋을 남자는 없지. 니 안에 머물러 있던 사랑이 그런 식으로 점점 모양을 드러내고 있는 거야. 여기선 그걸 사랑이라고 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면 드라마 한 편 봐!”
“드라마요? 봤어요.”
“벌써 거기까지 진도를 나갔어?”
이선이 의아해한다. 대견하기도 하다. 두 느낌이 함께 다가온다.
“어떻든?”
뫼가 잠시 반응을 하지 않는다. 이선의 말을 듣지 못해서가 아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이선의 말이 떠올라서다. 그 말이 아프게 찌르고 들어온다.
“소감이 어떻더냐고?”
“우리들과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뫼가 김이 죄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별로였나 보구나?”
“아뇨? 볼 때는 대단했어요. 다들 흠뻑 빠져서 1편부터 마지막 편까지 일어나지도 않고 봤어요. 드라마틱하다는 말을 알겠더라고요.”
“그건 실제 삶이 아니야. 작가에 의해 가공되고 배우들이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낸 삶이야. 진짜 삶은 아니지만 진짜보다 더 진짜 같지. 사람들이 흠뻑 빠져들 만큼. 드라마를 보면서 드라마 속 들장인물이 된 기분을 느끼는 사람도 많아.”
“말씀대로더라고요. 보는 내내 2013년의 현실이 신기했어요.”
“현실만 그런 게 아니야. 사이버공간도 마찬가지야. 현실을 복사해서 올려놓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구미를 자극하도록 꾸며서 올려놓은 것들이 수없이 많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려는 욕심의 산물들 말이야. 사람들의 욕구가 가 닿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것을 충족시키는 산물이 있게 마련이거든.”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만 별개인 거군요?”
“만 년으로 설정이 되어 있으니까. 만 년이 7987년 전의 현실과 같은 모습이라면 별로잖아. 하지만 현실과 다른 게 너희들 뿐만은 아니야. 판타지들이 넘쳐나거든.”
“판타지는 뭔가요?”
“현실과는 아주 다른 거.”
“현실과는 다른데 어떻게 그곳에 존재하나요?”
“공존할 수는 있으니까. 현실엔 없지만 사람의 머릿속에는 있거든. 너도 알다시피 상상이란 끝이 없어. 만 년도 만들어낼 수 있잖아. 그렇다고 만 년이 2013년의 현실로 옮겨올 수는 없어. 사람의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다 형태를 띠고 밖으로 나오면 상상의 부산물로 현실과 공존할 수는 있지. 그게 판타지야.”
“상상이란 거 대단하네요.”
“그렇지. 하지만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야. 모든 것엔 양면성이라는 게 있게 마련이거든. 상상도 마찬가지야. 뭘 상상하느냐에 따라 세상에 도움이 될 수도, 세상을 헤치는 것이 될 수도 있어.”
“그 말이 아프네요. 늘 즐거움의 끝은 늘 아픔이네요. 드라마를 봤을 때도 그랬어요. 보는 내내 웃고 울다가 나중엔 아픔만 남아서 마음을 할퀴고 있더라고요.”
“거기에 너무 매이지 마! 그럼 즐거움은 등을 돌려. 니들뿐만이 아니야. 이곳도 마찬가지야. 즐거움과 기쁨, 슬픔, 허무함, 아픔 등등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게 삶이야. 마음에 따라 기분도 수시로 모습을 바꿔. 여기라고 거기와 다를 게 없어. 그러니 니들만이라는 슬픔 속에 스스로를 가두지 마! 그러다 정신병에 걸리는 사람도 이곳엔 수두룩해.”
“그런 거군요? 우리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거군요?”
“맞아. 기쁨, 희망, 즐거움만을 안고 태어난 생명체는 세상에 없어. 신이 세상에 뿌려놓은 온갖 기분을 다 맛보며 살아가는 게 삶이야. 새로운 환경을 만날 때마다 온갖 기분들이 다가와 달라붙는데, 그 중에서 뭘 선택하느냐에 따라 기분은 달라지지. 삶이란, 수시로 바뀌는 환경과의 일생에 걸친 싸움이야. 그게 싫어서 미리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거야. 그걸 다 딛고 올라서는 사람이 이기는 거거든. 자신뿐만 아니라 신도, 인간도. 그러니 니들만이라는 억울한 생각을 만들어 그 속에 갇히지 마! 그건 불행의 시작이야. 그 생각을 갖고 힘든 것을 이겨낸 사람은 없어.”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이젠 그 생각을 미련 없이 버려야겠어요.”
“그래. 한데 드라마는 어떻게 봤어? 가입을 해야 할 텐데 말이야. 아참. 어떻게 내 카페에 가입을 했어? 주민번호나 아이핀이 있어야 가입이 가능한데 내가 그걸 깜빡했어.”
“처음엔 거기서 어찌 해야 할지 막막하더라고요. 한데 머릿속이 꿈틀거리더니 주민번호가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어렵지 않았어요. 드라마 볼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이선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상하네? 출생신고를 해야 부여받을 수 있는 번호인데? 니 기억장치 속에 누군가의 주민번호가 입력된 게 틀림없어. 그러니 함부로 여기저기 주민번호를 남기지 마! 가입하는 걸 더는 하지 말라고. 자칫하면 그게 흔적이 돼서 놈들에게 걸려들 수도 있으니까.”
이선이 걱정을 드러낸다. 씁쓸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이선의 말이 나쁘지 않다. 머릿속에서는 들로 인한 언짢음이 깨끗이 비워지고 없다. 대신 귓가에 셋이 주고받았던 말들이 또렷하게 들려온다.
“아 참! 깜빡할 뻔 했어요. 맞아요! 놈들이 있어요. 아줌마 말이 모두 맞았어요! 우릴 만들어내고 도촬해서 팔아먹고 있더라고요. 세 놈이었어요. 그게 막혀서 지금 혈안이 되어 우릴 찾고 있어요.”
뫼가 언제 그랬냐 싶게 들뜬 목소리로 놈들의 이야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