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는 여자를 떠올린다. 흔들리던 눈빛이 가장 크게 다가온다. 그 눈빛 때문에 마음을 놓았다.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줄 알았다. 일을 저지를 만큼 담이 크지 않아 보였다. 글이나 쓰는 여자라고 과소평가 했다. 뒤통수를 한방 크게 얻어맞은 기분이다. 그 얼얼함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한데 뫼가 어떻게 여자를 찾아낸 거지? 그 부분이 아무래도 이상해. 과정이 뚝 잘려나가고 없어. 찾아 헤매고 있기는 했지만 너무 의외였어. 글자를 쳤는데 그곳이 어떻게 여자의 작업 화면이야? 그건 말이 안 돼. 가상세계가 그에게 너무 쉽게 열렸어. 그 점도 영 이해가 안가.”
소훈은 그동안 고개만 갸웃거리고 넘어갔던 부분들을 들춰낸다. 애니와 달리 뫼가 여자를 찾아낸 게 영 이상하기만 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상세계에서 현실을 더듬어 찾아낼 수는 없다. 기껏해야 인터넷 자료가 전부다. 그 걸로는 여자를 찾아낼 수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한데 뫼는 여자를 찾아냈다.
“가상세계와 현실이 매개가 없이 넘나든다? 그건 계획에 없었잖아. 가상세계에 가둬두기로 했잖아. 만 년으로 알고 살아가게 내버려두기로 했잖아.”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말이 되지 않는다. 애니에게 왈칵 쏟아낸다.
애니는 못 들은 척 한다. 소훈의 말을 신경 쓸 마음도 아니다. 복구할 생각으로 머릿속은 들끓는다. 한데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뫼가 자판 소리를 듣고 있었어. 여자가 산길을 걸어가던 모습도 보았고. 누가 그걸 뫼와 연결해 놓은 거지? 그땐 별 일 없어서 그냥 지나쳤는데, 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돼.”
소훈은 그 생각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애니라면 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애닌 딴 곳을 더듬고 있다. 소훈의 말이 신경에 거슬린다.
“쓰잘머리 없는 생각에 그만 매달려! 지금 그걸 생각한다고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잖아.”
애니가 버럭 화를 낸다. 복구할 생각으로 복잡한데 소훈의 말참견이 얽혀들어 생각이 중간에서 뚝뚝 끊긴다. 짜증이 난다. 소훈이 그쪽으로 생각을 더듬어 가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도 한 몫 더해진다.
“너지? 니가 뫼에게 손을 댄 거지? 아냐?”
소훈이 감을 잡기라도 한 듯 애니에게 화살을 돌린다. 워낙 그쪽으로 빠싹한 애니다. 그를 따라올 사람이 손을 꼽을 정도다.
“내가 뭘?”
애니는 시치미를 떼기로 한다. 버럭 성을 내며 발뺌을 한다. 하지만 소훈도 만만치 않다. 거머리처럼 엉겨 붙는다.
“너라면 하고도 남아. 분명 너야.”
“그래. 나야. 정보인식판에 아이핀과 주민번호를 입력했어. 그래서 어쩔 건데?”
애니가 소훈의 닦달에 숨기고 있던 사실을 휙 던지듯 뱉어낸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입을 닫는다. 뫼의 몸에 온갖 생체정보를 다 넣어두었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그 생각을 하자 머릿속이 서늘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그것만은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한다. 그것까지 드러내면 가만있을 소훈과 이균이 아니다.
“그뿐이야?”
소훈은 애니가 그 정도로 끝냈을 거 같지가 않다. 돈 때문에 흐려졌던 머리가 그제야 돌기 시작한다. 애니를 격하게 몰아붙인다. 그 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애니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뿐이냐고?”
소훈이 윽박지른다. 달려드는 기세가 만만치 않다. 애니가 움찔한다.
“여자의 컴퓨터와도 연결해뒀었어. 그래야 더 실감이 날 거 같아서. 일이 이러게 될 줄 예상을 못했어. 그래 내 잘못이야.”
애니가 소훈의 눈길을 밀어내지 못하고 하나를 더 말하고 순순히 잘못을 인정한다.
“속이기 없기로 했잖아? 적어도 나한텐 얘기를 했어야지?”
소훈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애니가 운전대를 잡은 채 움찔한다.
“죽고 싶어? 운전 중이잖아?”
애니도 맞받아서 꽥 고함을 지른다.
“넌 니 맘대로야. 자금을 댔다고 권한이 니게 다 있는 게 아니야. 나도 참여했어. 나도 너 못지않게 뛰었다고. 한데 어떻게 말 한마디 없이 너 혼자 뚝딱 해? 이걸 이균이 알면? 이균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소훈이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만 해!”
애니가 말에 심지를 돋워 말한다. 소훈이 열이 받는지 옷을 벗어 뒤로 휙 던진다.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다.
애니는 애니대로 마음이 부글부글 끓는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순전히 자신 탓이다.
“망할 여편네, 글이나 쓰는 고리타분한 아줌마인줄 알았더니 이쪽에도 꽤나 일가견이 있었어! 이렇게 내 뒤통수를 쳐?”
화를 삭일 수가 없다. 괜히 여자를 탓한다. 아니 괜히가 아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바짝 마른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았다. 살아있는 건 눈밖에 없어 보였다. 글이나 끄적거리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더 들여다볼 것도 없었다. 웹캠으로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데도 눈치도 채지 못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한데 그런 여자가 칼자루를 쥐더니 전세를 보기 좋게 뒤집어 버렸다. 속이 뒤틀리고 배알이 꼬인다. 열이 치솟는데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속이 달아오르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소훈과 상관없이 지껄여보지만 분풀이는 되지 않는다.
소훈은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등받이에 기대고 있다. 애니를 무시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생각이 애니에게로 향한다. 자신의 입으로 속이지 말자는 다짐을 받아냈으면 지키는 게 도리다. 한데 스스로 다짐까지 받아놓고 속였다. 그게 너무도 분해서 차안이 아니라면 삿대질이라도 해가며 분을 마구 쏟아낼 거 같다. 그러면 속이라도 후련할 거 같다. 한데 달리는 차안이다. 차안에서 그런다면 애니 말대로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이다. 꾹 참고 있자니 좀이 쑤신다. 뒤치락거리기라도 해야 한다. 한데 움직이는 것조차도 귀찮다. 몸과 생각이 겉돌고 있다. 입도 꾹 다문다. 말도 섞기 싫다. 침묵이 길어진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소훈은 소파로 가서 몸을 던진다. 팔짱을 끼고 누워 눈을 감는다. 애니의 알짱거림마저도 거슬린다. 귀도 뭔가로 틀어막고 싶다. 말똥거리는 머리도 종이를 구겨 채워 넣고 싶다. 모든 걸 닫고 싶은데 여의치 않다. 애니의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음과 달리 귀가 예민해진다.
‘찾아낼 수 있을까?’
애니라면 그럴 수도 있을 거 같다. 그의 집요함은 추종할 자가 없다. 한 번 생각이 꽂히면 손에 넣을 때까지 잠도 쫓아낼 수 있는 위인이다. 하지만 언제 등을 돌릴지 알 수 없는 놈이기도 하다. 그걸 모르고 손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빈털터리였다. 손에 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애니의 실력이 탐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 빼앗거나 훔쳐낼 수가 없었다. 그래 두 눈을 딱 감았다. 생각도 멈춰 세웠다. 따지지 않기로 했다. 자잘한 것으로 여기고 감수하기로 했다. 돈이 들어왔다. 통장에 돈이 쌓여갔다. 기분이 좋았다. 애니가 동기간보다도 좋았다. 생각한 대로 모든 게 잘 작동했다. 한데 돈뭉치가 빠져나가려 한다. 그의 생각도 멈춰 서려 한다. 그의 마음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려 한다. 생각도 마음 쪽으로 움직여 갈 기세다.
“손 뗄 거야? 맘대로 해. 널 붙들 생각 없으니까.”
애니가 다가오더니 시체처럼 누워있는 소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그 말에 소훈의 머리가 확 깬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되찾기만 한다면 돈이 저절로 굴러들어올 일이다. 그걸 버릴 수는 없다. 정신이 바짝 난다.
“손을 떼긴? 왜? 손을 떼기라도 바라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니가 가겠다면 기를 쓰고 잡지는 않겠다는 뜻이야.”
딴 곳을 헤매다가 생각이 났는지 한참만에야 말이 건너온다.
“자식, 기를 쓰고 잡더니 이젠 쓸모가 없어졌다는 거냐?”
소훈이 서운한 마음을 내비친다. 서운하다. 돈줄에서 튕겨져 나오고 싶지 않다. 애니가 소훈에게는 돈줄이나 다름이 없다.
“자식, 니 투정 받아줄 시간이 없어서다? 헛소리는.”
소훈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애니의 컴퓨터로 다가간다. 애니의 손이 거침없이 움직인다. 그에 따라 화면이 확확 바뀐다. 하지만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이 맘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여자의 컴퓨터에 접속해 봤어?”
“뚫고 들어갈 수가 없어. 방어막을 여러 겹으로 쳐 놨어. 뚫리지가 않아. 엊그제까지만 해도 까막눈이더니 며칠 사이에 아주 똘똘해졌어. 망할 여편네. 어떻게 이렇게 뒤통수를 쳐?”
여자를 믿었던 게 뼛속까지 아프다. 뫼를 너무 얕본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다가온다. 뫼가 여자를 찾아냈을 때만 해도 대견하다는 마음뿐이었다. 여자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솔직히 글 쓰는 거 외엔 뭘 해낼 거 같지가 않았다. 그런 여자가 일을 내고야 말았다. 것도 아주 크게.
“웹캠은? 웹캠도 작동하지 않아?”
“그것도 먹통이야. 지금은 쓸모가 없어. 봐! 넘어오는 게 하나도 없잖아. 해킹도 안 돼. 어떻게 한 건지 알 수가 없어.”
애니가 답답함을 내보인다. 소훈은 믿기지가 않는다. 여자도 여자지만 애니가 쩔쩔 매는 게 영 낯설다. 늘 거침없이 컴퓨터를 다루는 그였다.
“너도 안 되는 게 있냐?”
애니가 눈을 흘긴다. 속이 타 들어가는데 말장난에 쓸릴 기분이 아니다.
“아니? 이쪽으론 니 머리가 신의 머리 버금가잖아. 아니다. 신도 이쪽으로는 니 다음인가?” 소훈이 그를 추켜세운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맞장구를 쳐줄 만큼은 아니다.
“폭탄 메일이라도 보내!”
“그러고 있어. 받는 족족 열어보지도 않고 삭제해버려서 맥 빠져 그렇지.”
소훈의 참견을 싹둑 잘라내지 않고 순순히 받아준다. 하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는다. 메일을 보내고 수신 확인을 해보고. 그 짓거리만 되풀이하고 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여자가 스팸처리까지 하는 바람에 한 번 써 먹은 메일 주소를 두 번 다시 써 먹을 수도 없다. 머리가 아프다. 평범해 보이는 겉과는 생판 다른 여자의 내면이 궁금하다. 외부에서 오는 메일을 열어보지 않고 삭제하는 걸 보면 세상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보기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숙맥 같았는데. 여자를 얕봐도 너무 얕본 모양이다. 그게 너무도 분하다. 어지간해선 사람을 믿지 않는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사람을 철석같이 믿을 거 같은 여자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여자의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은 대가다.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다.
그런 자신에게 화가 치민다. 보이는 걸 죄 때려 부수고 싶다. 하지만 소훈이 보고 있다. 메일을 보내고 빠져나와 다시 마우스를 굴리고 누른다. 하지만 헛손질이다. 걸려드는 게 없다. 애니민들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앞이 캄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