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가 앞서 달려간다. 들과 버들, 아미가 문 밖에 나와서 손을 마구 흔든다.
“어서 와!”
버들이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외친다.
“화면에서 우릴 따라온 거야?”
“숲 깊숙이는 따라가지 못했어. 그 안까지는 화면이 잡아내지 못하더라고. 아님 우리가 놓쳤는지도 몰라. 사자라도 만났을까봐 걱정되더라.”
들이 걱정이 가신 얼굴로 뫼와 이든, 누리를 번갈아 본다.
“사자는 안 만났어. 우리가 사자가 돼서 으르렁거렸지.”
“사자? 웬 사자?”
“사자처럼 살아있는 생명을 움켜쥐었어. 요 놈이 바로 그 놈이야.”
누리가 토끼를 쑥 앞으로 들이민다. 들과 아미, 버들이 기겁을 한다. 셋이 기겁을 하자 누리는 재미가 붙는다. 해실거리며 셋을 번갈아가며 놀린다.
“야, 누리! 뭐야?”
버들이 반가움에 다가오다 멀찍이 달아난다. 들도 아미도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난다.
“뭐긴?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이지. 언제까지 열매만 따다 먹을 건데? 내 몸이 일깨워주는 건데, 남의 살도 먹어줘야 한대. 열매만 먹어대다 힘이 죄 빠지고 나면 어찌할 건데?”
“설마?” “설마가 현실이 되면?”
“너, 괜히 할 말 없으니까 둘러대는 거지? 그런 거 아냐?”
버들이 까칠하게 받아친다.
“둘러대긴? 내 세포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인데. 난 요놈이 먹고 싶다고. 정확히 말해서 내가 아니라 내 몸의 세포들이 요놈을 먹어달라고 졸라대.”
“그래서였구나?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잡았나 했더니 니 몸의 세포가 그걸 먹고 싶다 해서라고? 말 되네.”
“이든, 너는 별 수 있는 줄 알아? 너도 조만간 몸에서 신호가 올 걸? 버들 너도 그렇게 새침하게 굴지 마! 한 번 만져 봐! 얼마나 토실토실한지.”
누리가 다시 토끼를 버들 앞으로 들이민다.
“그만 해! 안 그럼 나 삐질 거야?” 버들이 정색을 한다. 당하고만 있으려니 약이 오른다.
“나도.”
“나도 싫어.”
아미와 들도 피하는 건 내던진다. 돌아서서 누리를 노려본다.
“나한테 또 들이밀면 집어던져버릴 거야.”
아미가 까칠하게 대든다. 누리가 히죽 웃는다. 까칠하게 대드는 아미가 외려 더 재미있다.
“정말 걔 어떡할 거야?”
놀람이 가라앉았는지 버들이 웃으면서 다가온다.
“정말 먹을 거래.”
이든이 누리 대신 대답한다.
“어떻게? 설마?”
버들이 다시 뒷걸음질 한다. 뫼가 숲에서 보았다는 사자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왜? 그렇게 먹으면 안 되냐?”
“니가 짐승이냐? 숲-체질이라더니 사자 흉내라도 내겠다는 거야? 그래?”
버들이 누리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지며 까칠한 표정을 짓는다.
“버들, 걱정 마! 고상하게 먹을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뫼가 버들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버들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진다. 뫼의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이든이 옆에서 ㅋㅋ 웃는다.
“너도 먹겠다고?”
“정말? 뫼 너도?”
아미와 들도 정색을 하고 뫼를 쳐다본다.
“기운이 달린데. 먹어도 돌아서면 그때뿐이래. 쟤를 보고 있으면 입맛이 돈단다. 누리야 그렇다 치고 뫼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냐? 눈감아 줘야지.”
이든이 뫼를 두둔하는 말을 남기고 안으로 들어 긴다. 뫼는 멋쩍게 웃어 보이고 만다. 들은 누리에게 보였던 쌀쌀함을 거두고 뫼를 본다. 주저앉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긴 하지만 힘이 없어 보인다. 건드리면 쓰러질 거 같다. 그런 몸으로 누리에게 덤비려 했던 걸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먹을 방법은 있어?”
“아직.”
“아 참. 찾는 중이라 했지? 누린? 세포가 원하다며? 그럼 방법도 생각나지 않을까?”
“누리도 몰라.”
들은 누리에게 눈길을 돌린다. 누린 토끼를 거머쥔 채 돌판에 앉아 있다. 머리를 굴리는지 세포들을 닦달하는지 눈빛이 날카롭다.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세포들이 아우성이라더니 포기할 수가 없나보다.
누리는 난감하다. 의기양양하던 기분도 가라앉는다. 먹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하지만 사자처럼 피범벅을 하고 먹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말은 그렇게라도 먹겠다고 했지만 그건 그냥 해본 소리였다.
입안에서는 침이 자꾸 고인다. 하지만 사자처럼은 싫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토끼를 손에 쥔 채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다.
‘불. 불이야. 불이 있어야 해. 어떻게 불을 피우지? 불은 생각이 나는데 왜 피우는 방법은 생각이 나질 않는 거지? 기억을 잘 더듬어 보자. 내 몸속 어딘가 있을 거야.’
누리는 토끼를 꽉 움켜쥔다. 토끼가 놀라 발버둥을 친다. 그의 손이 억세게 토끼의 두 귀를 틀어쥐고 놔주지 않는다. 입맛이 당긴다. 먹고 싶다. 열매는 신물이 난다. 더는 단맛이 돌지 않는다.
궁리를 짜낸다. 아무리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도 쉬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도 물러날 수가 없다. 찾아내야 한다. 단맛을 밀어낼 수가 없다. 머릿속엔 기억이 없는데 세포들은 기억하고 있다. 눈동자를 굴린다. 기억을 끌어내야 한다. 고기 맛을 기억하고 있듯 방법도 기억해내야 한다. 한참을 헤맨다.
‘부싯돌.’
갑자기 단어 하나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는 그 말을 입안에서 여러 번 소리 내어본다. 그 단어와 얽혀 있는 다른 것들을 더 꺼내야 한다. 그 단어 하나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다 알 수가 없다. 불을 피우는 도구라는 것만 어렴풋이 다가올 뿐이다.
누리는 뫼에게 간다. 뫼는 컴퓨터 앞에 있다. 고상하게 먹을 방법을 찾는 눈치다. 누리가 손가락으로 그를 톡톡 건드린다. 뫼가 몸을 돌린다. 누리가 토끼를 손에 든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시선이 토끼에게 가 박힌다.
“너도 아직 찾아내지 못한 거지? 나도야. 2013년의 자료들을 뒤적여보는데 쉽지 않아.”
말이 밍밍하다. 하지만 눈빛은 살아난다. 토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부싯돌이 뭐냐?” 누리가 뫼의 말을 제쳐두고 묻는다.
“부싯돌?”
뫼는 부싯돌이 뭔지 모른다. 누리의 얼굴이 시들하다. 평소의 누리답지 않다.
“그게 있어야 하는 거야?”
“불을 피우려면 그게 있어야 하나 봐! 하지만 나도 그게 뭔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어.”
“불을 피워서?”
“구워야 해. 그럼 피범벅은 없어. 게다가 맛도 있을 테고.”
“정말? 어떻게 알아냈어?”
고상하게 먹을 방법을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반갑다. “스칠 듯 다가왔어.”
뫼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난다. 누리의 말을 듣고 보니 어렴풋이 그의 머릿속에서도 뭔가가 떠오른다. 다만 또렷하지 않을 뿐이다. 입안엔 침이 가득 고여 간다. 뫼는 누리에게 들킬까봐 소리 나지 않게 침을 삼킨다.
“모르겠지?”
“그럴 걸? 알았으면 쌀쌀맞게 들어갔겠어?”
누리가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여자한테 떼를 써볼까? 혹시 알아? 슬며시 던져줄지.” “꿈 깨. 여자한테 우린 못 된 피조물들이야.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가지 않는 것만으로도······.”
말이 벼랑을 만난 것처럼 뚝 잘린다.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다. 눈동자가 허공을 헤맨다.
“고마운 존재는 아니지. 쉬어. 나도 가서 자야겠어.”
누리가 나머지 말을 뱉어낸다. 그의 얼굴빛이 어둡다. 등을 돌리고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간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눈을 감아보지만 말똥말똥하다. 누리가 숲을 빠져나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 기분 처음인 거 같아. 20대로 살아본 거. 늘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나이의 가장자리만 어슬렁거린 느낌이거든.’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이 다가오지도 않은 나이의 가장자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처음이었다. 낯이 설어서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말이 자꾸 귀청을 때린다. 몸을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든다.
잠결인데 누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꿈을 꾸고 있나보라고 생각한다. 한데 몸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누군가 흔들어대고 있다. 누리의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꿈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만 좀 자! 일어나라고.”
“뭐야?”
잠이 묻어있는 목소리다.
“웬 잠투정? 잠투정 그만하고 일어나봐!”
“왜? 부싯돌이 뭔지 생각이라도 났어?”
누리의 호들갑에 뫼가 넘겨짚는다.
“것 때문에. 묶어두고 언제까지 군침만 삼킬 순 없잖아. 너도 먹어야 기운이 날 거라며? 힘이 달린다면서?”
“아무리 뒤적여도 나오지 않는 걸 어떻게?”
뫼가 짜증을 낸다. 입맛은 당기지만 사자처럼은 싫다. 힘이 달리고 열매가 물리지만 그래도 사자처럼은 아니다.
“여자밖에 없어. 속이 쓰려도 어쩌겠어. 망할 놈의 여편네밖에 없는 걸? 너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뭘?”
뫼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뗀다.
“여자 맞잖아.”
“뭐가?”
“뭐긴? 부싯돌 말이지. 그걸 기억하게 해준 거 여자 맞잖아.”
뒤늦게 후회하지만 소용이 없다. 누린 아무렇지 않게 뜸도 들이지 않고 되돌려 보낸다. 여자의 온몸이 흠집도 없이 그의 머릿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렇-지?”
뫼가 뜸을 들이며 대답한다. 여자는 이미 머릿속으로 들어와 있다. 밀어내도 여자는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외려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머문다. 그게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그래 말도 가뿐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여자한테 물어보자고? 여잔 알고 있을 거 아냐?”
어이가 없다. 누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다.
“우린 여자한테 맞서고 있는 중이야. 그건 싫어!” “싫으면?”
“다시 뒤적여볼게.”
뫼는 누리의 말에 떠밀려 화면 앞으로 간다. 마우스를 굴리고 누르고 한다. 그의 손놀림이 잽싸다. 하지만 부싯돌은 비껴갈 뿐이다. 그는 여자가 그러했듯이 부싯돌을 입에 올린 후 여러 번 되뇌어 본다. 그래봐야 소용이 없다. 부싯돌은 짠하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자판에서 부싯돌의 자모를 찾아내 순서대로 두드려본다. ‘부시-’를 치자 아래로 ‘부시-’가 들어간 단어들이 뜬다. 그가 뭔가 하고 읽어 내려간다. 그러다 누리가 말한 부싯돌에 이른다. 커서를 옮겨 눌러본다. 신기하다. 하얀 네모 안에 부싯돌이 써진다.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한참을 어찌할지 모른 채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가 검색이란 글자를 눌러본다. 화면이 쓱 바뀐다. 부싯돌이라는 단어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