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맞춰 여자의 글쓰기는 멈추어 있다. 화면이 더 이상 반응을 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멈추어버린 채 그대로일 뿐이다. 여자가 자리를 뜬 모양이다. 잠을 자러 간 건지, 아니면 운동을 하러 간 건지 알 수가 없다. 더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뫼는 굳어져가는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화면과 들을 번갈아 본다. 들은 입을 앙다문 채 움직이지 않는다.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잠을 자고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잠을 자는 게 아니다. 숨 쉬는 것을 빼고 모든 게 멈추었다. 눈을 뜨고 있지만 눈동자는 움직이지도 않는다. 뫼는 들에게 말을 걸어보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입도 머리도 모두 움직이질 않는다.
뫼는 손을 꼼지락거린다. 어렴풋이 여자가 떠오른다. 힘들게 생각을 끌어낸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쥐어짠다.
‘여----자---의- -상---상---이- -멈----추—었----어-.’
몸에서 식은땀이 비질비질 흐른다. 생각을 해내느라 멈춰버린 것을 억지로 움직인 대가다. 잠시 생각의 끈을 놓는다. 기가 너무 빠져 힘이 없다. 그렇지만 그대로 멈출 수는 없다. 그는 다시 생각을 쥐어짜낸다.
‘여-- -자—의- -상—상-이- -닿—아-있—는- -연-결—고-리-를- -끊-- -어-내-야- -해-.’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하다. 기진하여 쓰러질 거 같다. 힘겹게 눈동자를 굴려 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들은 여전히 화면만 바라보고 있다. 그녀에게서 시간과 생각은 모두 멈춘 상태다. 도움을 바랄 수가 없다. 외려 그가 들을 도와야 한다. 들을 깨워야 한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들을 부른다.
‘-들---!’
아무리 힘을 쥐어짜내도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힘을 쥐어짜내 들을 불러본다. 마찬가지다. 불러 깨우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이번엔 손을 뻗어 들을 깨워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것도 맘대로 되지 않는다. 마음뿐이다. 손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힘이 죄 빠져 몸이 축 늘어진다. 뫼는 들을 깨우겠다는 생각을 그만둔다. 일단 몸부터 추스르기로 한다. 기력을 되찾는 것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뫼는 여자가 빨리 화면 앞으로 와줬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란다. 여자가 오지 않으면 시간은 멈춘 채 움직이질 않는다. 그러면 들도, 이든도, 누리도, 버들도, 아미도 모두 깨어나지 못한다. 물론 자신도 온전하게 깨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무엇보다도 힘이 죄 빠진 몸을 되찾는 게 먼저다. 몸을 되찾으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그렇잖으면 남은 기력마저 빠져나가 버틸 재간이 없다. 그의 몸에서 남아있는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다. 한데 그는 주저앉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서서 고통을 견뎌내고 있다. 그마저도 언제 바닥이 날지 알 수가 없다. 의지를 끌어낼 만큼의 힘이 남아있지도 않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점점 더 커져가는 고통으로 죽을 것만 같다.
여자를 애타게 불러본다. 하지만 여자 역시 기진했는지 화면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수척한 여자의 얼굴이 죽음을 달고 있는 모습으로 떠오른다. 여자는 제법 여러 날 동안 잠잠하다. 뫼는 서서히 메말라간다. 이젠 바람을 가져볼 힘도 남아있지 않다. 며칠만 더 지나면 죽음이다.
다행이 여자는 뫼가 죽음에 이르기 전에 화면 앞으로 온다. 뫼가 푹 쓰러진다. 들이 화들짝 놀란다. 그녀는 멈추어 있었던 긴긴 시간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저 잠깐의 시간이 지난 것으로 느끼고 있다. 그래 뫼가 쓰러진 걸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뫼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이 간절하다.
“뫼! 뫼!”
정신없이 불러보지만 소용이 없다. 들은 아미와 버들을 불러들인다. 아미와 버들 역시 놀라 기겁을 한다.
“왜 그래?”
“나도 모르겠어. 갑자기 푹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뫼였어.”
“우선 침대로 옮기자!”
아미가 정신을 차리고 뫼의 윗몸을 들어올린다. 들과 버들이 얼른 뫼의 다리 쪽으로 가서 마주 들어올린다.
침대에 눕혀진 뫼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서늘할 정도로 야위어 있다. 다들 울먹울먹한다.
“갑자기 사람이 이렇게 될 수도 있어? 이건 사람 꼴이 아니야. 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
아미가 따지듯 묻는다. 들은 고개만 가로젓는다.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녀 역시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들,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거야?”
아미가 따지 듯 묻는다. 들은 억울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은데 증명해 보일 게 없다. 눈물을 글썽인 채 아미를 바라본다.
“아미, 나도 모르겠어. 말을 하고 싶지만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들의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 아미도 더는 닦달하지 못하고 물러선다. 이 상황에서 사람을 몰아세워 봐야 좋을 게 없다. 사람을 잃으면 살아있는 사람들만 억울하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외려 살아남은 사람들이 불쌍하다. 일단은 뫼를 살려야 한다. 뫼에게 뭔가를 먹여야 한다.
“숲에 가서 먹을 걸 따와야겠어. 들, 같이 갈 수 있겠어?”
“난 여기 있을게. 뫼 옆에도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
들이 힘이 죄 빠진 목소리로 말한다. 들의 그런 모습이 가엾다. 그녀가 허겁지겁 정신 나간 모습을 한 것이 처음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다들 가슴이 아프다. 아미는 물끄러미 들을 바라본다. 누워 있는 뫼도 그렇지만, 그를 바라보는 들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 버들과 내가 다녀올게.”
아미와 버들은 잽싸게 숲으로 뛰어간다. 닥치는 대로 열매를 따 모은다. 열매가 넓은 잎에 수북이 쌓여간다.
“버들, 그만 돌아가자! 가서 뫼에게 먹이자!”
아미의 말에 버들이 냅다 뛰기 시작한다. 뫼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미와 버들의 마음이 소용돌이친다.
들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뫼 옆에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간간이 뫼를 애타게 불러대지만 뫼는 못 들은 사람처럼 꿈쩍을 하지 않는다. 속이 바작바작 타들어간다.
“들! 괜찮아질 거야.”
버들이 다가가 들의 어깨를 감싼다. 그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버들, 나 겁이 나. 뫼가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 죽겠어.”
들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다. 몸도 가녀리게 떨고 있다. 아미도 다가와서 들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버들 말대로 괜찮아질 거야.”
아미가 들의 어깨를 토닥인다. 들의 말이 틀리지 않다면 뫼 하나로 끝날 일도 아니다. 어쩜 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거일지도 모른다. 갑자기 아미에게도 두려움이 밀려온다.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닌데 두렵다. 살아있음이 두렵다. 생각이 멈추지 않아서 두렵다. 끊임없는 메아리가 되어 맴도는 생각이 두렵다. 누가? 왜? 뫼와 들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아미는 버들과 함께 열매에서 즙을 짜낸다. 그런 다음 그걸 뫼의 입에 흘려 넣어준다. 꿀꺽하는 소리가 들린다. 뫼가 즙을 삼킨 모양이다. 아미는 다시 뫼의 입을 벌리고 즙을 넣어준다. 뫼는 흘려 넣어주는 대로 받아 삼킨다. 하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는다. 푹 꺼진 눈두덩도 살아나지 않는다. 다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침대 난간에 걸터앉아서 뫼만 바라본다.
“이든과 누리는 언제 오려나. 빨리 돌아오면 좋으련만.”
버들이 뫼의 볼을 어루만지며 낮게 중얼거린다. 아미도 들도 같은 생각을 한다. 둘이 온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래도 다섯이 셋보다는 낫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들은 아미의 말에 안절부절 못한다. 뒤늦게 아미가 후회한다. 그녀는 얼른 들을 감싸 안는다.
“들, 너에게 한 말이 아니야. 널 탓하려 한 말이 아니라고. 답답해서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왔어. 그러니 마음 놓아.”
아미가 들의 어깨를 감싼 채 토닥인다. 다들 할 말을 잊는다. 말을 꺼내면 외려 그게 상차가 된다. 그저 멍하니 앉아서 뫼를 바라보기만 한다.
이든과 누리는 어둑해질 무렵이 돼서야 신이 나서 돌아온다. 모두의 집을 한 바퀴 돌아 마지막으로 뫼의 집으로 들어선다.
“애들아!”
누리가 장난기가 잔뜩 얹힌 목소리로 부른다. 아무도 대답이 없다. 소리를 못 들은 것도 아니다. 아무도 누리의 장난기에 대꾸할 마음이 일지 않는다. 셋 다 입을 꾹 다문 채 돌아보지도 않는다. 타들어가는 시선으로 뫼를 보고 있다.
“왜 대답을 안 해? 뭐 하는 거야?”
누리가 다가오며 투덜거린다. 들과 아미, 버들은 뫼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눈물만 글썽이고 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제야 감지한다. 이든과 누리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거둬진다. 장난을 치기에는 모두의 모습이 너무 서늘하다. 꼭 사람의 마지막이라도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왜? 뭔 일 있어?”
누리와 이든이 다급하게 말을 쏟아내며 다가간다. 들이 그런 둘을 돌아본다. 들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한다.
“야, 왜 그래?”
이든이 불안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묻는다. 들은 눈물만 글썽일 뿐 대답이 없다. 아미와 버들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싸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