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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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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3

지원이의 보물 1호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였다.

매일 아침 누구보다 일찍 등교하면서도 머리 감는 건 빼먹지 않아서 머릿결에선 늘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탐스런 머리칼을 출렁이며 걸어가는 지원이의 뒤태는 아리따웠다. 수업 시간이나 남아서 공부할 때는 흘러내리지 말라고 고무줄로 대충 묶었는데 그 모습 또한 청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지원이한테 일생일대의 위기가 닥쳤다. 취업 명부에 붙여야 할 증명사진 때문에 머리를 잘라야 할 난관에 부닥친 것이다. 임 선생은 아침 조회 시간에 ‘가능하면 단발머리 스타일의 사진을 찍어 낼 것’을 요구한 취업과장선생의 ‘특명’을 전달하며, 지원이를 정확하게는 지원이의 긴 머리를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다.

며칠을 고심하던 지원이는 결국 미장원행을 선택했다.

“아까워서 어떡하니?”

“할 수 없지 뭐. 취직 하려면.......”

공부 외에 지원이의 유일한 낙이자 보람이었던 긴 생머리를 자른다고 생각하니 혜란이까지 괜히 심란했는데 지원이는 의외로 덤덤했다.

“근데 고작 증명사진 때문에 머리까지 잘라야 하는 거야? 당장 면접을 볼 것도 아닌데?”

“지원자 선발에서 서류 심사에 이르기까지 나를 대신해 줄 사진인데 당연히 중요하지. 그 모든 단계를 통과해야만 면접도 있는 거니까. 또, 한 번 찍어 두면 앞으로 이력서니 뭐니 해서 두고두고 써먹을 건데 이왕이면 예쁘게 찍어야지.”

집에서 굴러다니는 아무 사진이나 대충 갖다 낼 생각이었던 혜란은 어쩐지 머쓱해졌다. 그건 사진 찍을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기본 마음가짐의 문제였던 것이다.

학교 근처 미장원에는 온통 아는 얼굴들뿐이었다. 머리 자를 결심을 한 건 지원이만이 아니었던 데다 원래 단발머리인 애들도 사진 찍기 전에 얌전하게 드라이를 하려고 대기 중이었다. 한두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된다는 말에 잠깐이면 될 줄 알고 지원이를 따라 나섰던 혜란은 살짝 후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지원이가 공부 봐 주느라 투자한 시간을 생각하면 불평해서도 내색해서도 안 되었다.

혜란은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았다. 그런데 지원이는 반듯하게 앉은 채 머리를 자르는 아이들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었다.

“뭘 그리 뚫어지게 봐?”

“으응, 어떻게 자를지 가늠해 보려고.”

“단발로 자른다며?”

“단발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야. 자기한테 어울리는 스타일이 따로 있어. 그걸 찾아내야 돼.”

드디어 지원이 차례가 되었다. 지원이는 지켜보는 혜란이 대신 미안할 정도로 미용사의 가위질 하나하나를 체크했다. 어찌나 세심하고 집요하게 이것저것 요구하는지 미용사가 짜증을 낼까 봐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사진발을 잘 받고야 말겠다는 지원이의 집념이 가상했던지 미용사도 별말 없이 솜씨를 최대한 발휘해 주었다.

마침내 드라이까지 끝냈을 때 지원이는 딴사람이 돼 있었다. 긴 머리만 고수하다가 갑자기 머리가 짧아지면 좀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긴 머리였을 때의 고집스럽고 무거운 이미지에서 상큼하고 발랄한 쪽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고 볼 수 있었다. 혜란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원이도 만족스러운지 거울을 보며 활짝 웃었다. 이제 그 상태 그대로 사진관으로 직행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가는 길에 지원이는 기다려 줘서 고맙다며 아이스크림을 사 주었다.

폭신폭신하고 하얀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릴세라 혜란은 연신 혀를 놀렸지만 맛은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사진 한 장에조차 목숨을 거는 지원이한테서 새삼 전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찬찬히 살펴보니 지원이가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치마조차 예사로운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면접 보러 갈 때 갑자기 정장 치마를 입으면 어색하니까 미리미리 입는 연습을 해 두라는 선생들의 당부를 지원이는 흘려듣지 않았던 것이다. 반 아이들 60명 중에 한두 명이 입을까 말까 한 치마를 1학년 때부터 꿋꿋이 입고 다닌 지원이는 한 마디로 준비된 아이였다.

혜란은 지원이를 사진관으로 보내고 혼자 교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나갈 때 펴 놓았던 페이지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성적은 그 많은 취업 요건 중 하나일 뿐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 임 선생한테 뭔가를 보여 주겠다는 욕심이 쓸데없고 무모하게만 느껴졌다. 미장원에서 법석을 떨던 아이들 틈에서 남의 일인 양 구경만 하던 자신의 모습은 이미 낙오자나 다를 바 없었다. 혜란은 책상 위에 그대로 엎드려 버렸다.

 

5월초가 되자 드디어 취업 원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테이프를 끊은 것은 국내 중공업 분야의 선두 주자인 P사였다. 지원할 사람들은 오후 4시까지 취업보도실로 모이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3학년 교실 전체가 술렁거렸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P사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느라 분주했다. 수업이 끝날 때쯤 되자 뜻이 있는 애들이 하나둘 윤곽을 드러냈다. P사에서 요구하는 조건은 꽤나 구체적이었는데 특히 키와 체중을 강조했다. 늘씬하고 예쁘장한 애들이 자연스럽게 물망에 올랐다.

혜란이네 반에서 나갈 지원자 서너 명이 정해지자 이번에는 그 애들을 꾸며 주느라 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머리 모양을 다듬어 주고 치마나 구두를 빌려 주는 등 다들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었다. 어찌 보면 샘을 낼 만도 한데 그래도 이왕이면 같은 반 아이가 뽑혔으면 싶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취업과장선생한테 면접을 본 각 반별 지원자들 중 최종 8명이 뽑혔다. 혜란이네 반 아이도 한 명 포함되었다. 하지만 P사에 원서를 낸다고 해서 그 8명이 모두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관례적으로 절반 정도는 떨어진다고 했다. 선생들은 떨어질 걸 두려워 말고 조건만 되면 어디든 도전을 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