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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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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반


BY 하윤 2013-06-13

*졸업반

 

드디어 졸업반이 되었다.

3학년 담임은 놀랍게도 임 선생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던 첫날, 임 선생이 교실 앞문으로 쓱 들어올 때만 해도 혜란은 설마 했다. 새 담임한테 무슨 일이 생겨 임시로 들어온 것이려니 했다.

“우리, 일 년 동안 잘해 보자.”

임 선생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1학년 때도 임 선생은 그렇게 말했었다. 정말로 또 다시 담임이 됐단 말인가, 혜란은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임 선생은 출석부를 펼쳤다. 임 선생이 출석을 부르는 방법은 좀 특이했다.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른 다음 당사자와 몇 초간 눈을 맞추고 나서 다음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식이었다. 60명을 상대로 일일이 그렇게 하자면 지칠 법도 한데 임 선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평하게 웃음을 배분했다. 임 선생의 그런 방식을 처음 접하는 아이들은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 쩔쩔맸다. 그래도 따스한 임 선생의 눈빛이 다들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마침내 혜란의 이름이 불렸다. 혜란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혜란아, 얼굴 좀 보여 줘야지?”

임 선생이 말했다. 혜란은 눈을 내리깐 채 억지로 얼굴을 들었다. 임 선생의 눈빛이 온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면서 얼굴에서 확확 불이 나는 것 같았다. 다음 아이로 순서가 넘어간 뒤에야 혜란은 겨우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출석을 부른 후 곧장 키 순서대로 자리 배정을 했다. 정아는 어떻게든 혜란이와 짝이 되려고 발끝을 세우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혜란의 짝은 끝 번호를 달고 사는 지원이가 되었다.

임 선생은 바로 개인 면담을 시작했다. 그래서 하루에 열 명씩 남았다. 번호 순서대로 했기 때문에 혜란의 차례는 가장 마지막 날이었다. 기다리는 며칠 동안 혜란은 내내 긴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밀린 공납금 때문에 뻔질나게 교무실을 드나들 때의 죄스럽고 두려운 마음은 아니었다. 그때와는 확실히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임 선생한테 보여 주고 싶어 설레기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임 선생 앞에 섰을 때 혜란은 순식간에 예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임 선생과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자퇴하던 날의 정경이 떠올랐던 것이다. 마지막 인사를 거부하는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임 선생과 당당하게 떠나던 분희가 겹쳐지면서 혜란은 극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임 선생은 옆에 마련해 둔 의자에 앉으라고 했다. 혜란은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다소곳이 올렸다. 임 선생은 잠시 책상에 펼쳐 놓은 자료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혜란이, 성적이 많이 안 좋네?”

“급수도 아직 주산밖에 못 땄고?”

“이번에 치는 부기 시험에선 꼭 붙어야 된다?”

“그리고 삼학년 일 학기 성적만 보고 원서를 주는 데도 많으니까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

임 선생이 조용조용 격려와 당부의 말을 하는 동안 혜란은 고개만 주억거렸다. 얘기가 다 끝나고 임 선생은 혜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혜란아, 이젠 좀 활짝 웃어 보자. 그럴 때도 되지 않았니? 여전히 위축돼 있는 네 모습이 보기에 딱하구나.”

혜란은 허탈한 심정으로 교무실을 나왔다. 이젠 좀 웃을 때도 되지 않았니? 그 말이 특히 마음에 걸렸다. 성격을 많이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임 선생의 눈에는 여전히 예전의 모습으로만 비쳐졌다는 게 너무 속상했다.

 

혜란은 옛날의 자기가 아니라는 걸 임 선생한테 각인시켜 주고 싶었다.

졸업한 다음에도 임 선생의 기억 속에선 여전히 청승맞은 아이로 남아 있을 걸 상상하니 끔찍했다. 하지만 어떤 걸로 변화를 보여 주지? 전보다 잘 웃고 말이 많아지고 어울리는 친구가 늘었다는 것 정도로는 부족해 보였다. 가장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방법은 성적이었다. 혜란은 다시 한 번 공부에 매진해 보기로 결심했다. 임 선생한테 뭔가를 보여 주겠다는 의미도 컸지만, 올해 아니면 더는 기회가 없다는 점도 오기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여전히 막막했다. 다만 2학년 때보다는 훨씬 강도를 높여야 한다는 건 분명했다. 혜란은 저녁 9시까지는 무조건 학교에 남기로 했다. 작년에는 해가 지면 대체로 가방을 쌌기 때문에 오후 6시에서 7시 정도까지밖에 못했다. 3학년 교실은 야간부와 함께 쓰지 않아서 방과 후에 도서관으로 이동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어 좋았다.

혜란은 임 선생과 면담한 그날부터 학교에 남기 시작했다. 새로운 각오를 다진 건 혜란만이 아니어서 20여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교실에 남았다. 혜란은 우선 코앞에 다가온 부기 시험부터 집중하기로 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코에 단내가 나도록 매달렸다. 모르는 문제는 이 아이 저 아이 돌아다니며 물었다. 부기 1급까지 딴 지원이가 옆에 있었지만 공부 시간을 빼앗는 게 미안해서 그렇게 했다. 그랬더니 한번은 지원이가 왜 자기를 두고 먼 데까지 가느냐고, 시간이 아깝지 않으냐고 해서 그때부턴 지원이한테만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 번에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부기보다 더 쉬운 주산도 세 번 만에 붙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고는 싶었다. 왜냐 하면 거기에는 지원이의 시간도 포함돼 있으니까. 시험을 치던 날은 생각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으니 그걸로 됐다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주산 시험을 칠 때마다 떨어지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던 것과는 엄청난 차이였다.

 

그즈음 혜란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원이를 비롯하여 성적이 상위권인 아이들의 대부분은 대학 진학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 애들에게 취업은 하나의 징검다리였다. 대학에 들어가려면 재수 삼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러자면 어떤 직장에 취직하느냐가 관건이었던 것이다. 다들 대우가 좋고 출퇴근 시간이 확실한 직장을 선호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래야 저녁에 입시 학원이나 야간 대학을 다닐 수 있으니까. 지원이로부터 우연히 그런 계획을 전해 듣고 혜란은 소름이 돋았다. 자신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지원이에 비하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살아온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혜란은 더 독해져야 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실천하기란 쉽지 않았다.

수업이 오후 4시에 끝나면 곧장 공부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청소도 하고 밥도 먹는다는 핑계로 시간을 흐지부지 보내기가 쉬웠다. 혜란은 엄마한테 3학년들은 무조건 늦게까지 남아서 공부해야 하니 도시락을 꼭 싸 달라고 요구했다. 밤까지 있으려면 두 개가 필요하지만 하나만 안 빼먹고 꼬박꼬박 싸 줘도 감지덕지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는 그냥 굶고 방과 후에 도시락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면 소화를 시킨다는 명분으로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었다. 봄볕이 좋거나 바람이 덜 부는 날은 운동장 벤치에 앉아 놀기도 했다. 잠깐만 쉴 요량으로 앉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어 보면 어느새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그러면 얼른 교실로 돌아와 후다닥 자리에 앉아 보지만 그런다고 바로 몰입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혼자 있으면 잡생각이 수도 없이 몰려왔다. 그 모든 잡념들을 물리치고 드디어 집중이 좀 되는가 싶으면 그때는 벌써 집에 갈 시간이었다.

밤 9시가 넘으면 당직 선생이 각 교실을 돌며 그때까지 남아 있는 아이들을 강제로 귀가시켰다. 당직 선생한테 떠밀려 가방을 쌀 때면 혜란은 또 그렇게 어이없이 하루를 날려 버렸다는 사실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아는 만사태평이었다.

“야, 인상 좀 펴라. 세상 다 끝난 것처럼 왜 그래? 내일부터 열심히 하면 되지 뭐.”

그러면 혜란은 정아한테 소리라도 꽥 지르고 싶었다. 내일은 잘 될 거라고 누가 그래? 사실 혜란이 시간을 허비하는 데는 정아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 3학년 때 다시 한 반이 되면서 이미 예견했던 일이었다. 애초에 정아는 공부가 목적이 아니었다. 집에 가 봤자 재미도 없고 할머니 잔소리만 들으니까 그냥 학교에서 시간이나 때운다는 식이었다. 정아는 그날의 숙제만 겨우 끝내 놓으면 더 이상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질 못했다. 이 반 저 반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오만가지 일에 다 참견을 했다.

그중 정아의 유혹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 혜란이였다. 정아는 수시로 혜란의 옆구리를 찌르며 쉬었다 하라고 졸랐다. 그럼 진짜 잠깐만 쉬는 거라고 확답을 받았어도 정아의 수다 삼매경에 한번 빠졌다 하면 헤어나기가 힘들었다. 다시는 휘둘리지 말자고 결심해도 다음날이면 또 생글생글 웃는 정아한테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항상 허무하고 무거웠다. 그때마다 혜란은 애꿎은 정아를 원망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의지이고, 다른 건 모두 비겁한 핑계라는 것도 혜란은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