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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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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학년


BY 하윤 2013-06-13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새해가 밝았다.

혜란은 죽은 듯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운동도 중단했다. 시험 기간에도 기를 쓰고 다녔었지만 이젠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의 부업을 돕거나 집안일을 할 때 말고는 아예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방구석에 처박혀 도 닦느냐고 욕을 퍼붓던 엄마도 나중에는 지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정아한테서 전화가 왔다.

“야! 눈 오는데, 우리 오늘만큼은 만나야 되는 거 아니야? G대 정문에서 기다릴게. 빨리 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정아는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그동안 몇 번 만나자는 걸 번번이 거절했더니 작전을 바꾼 모양이었다. 물론 혜란은 거기에 말려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한 시간 후 혜란은 G대를 향하고 있었다.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정아의 협박 때문은 아니었다. 전화를 끊고 별 생각 없이 작은방으로 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는데, 느닷없이 눈을 구경하고 싶다는 충동이 밀려왔던 것이었다.

눈사람처럼 서 있던 정아는 혜란을 보더니 두 팔을 높이 쳐들고 팔짝팔짝 뛰었다. 정아는 일단 G대를 둘러보자고 했다. 눈이 펄펄 내리는 교정은 그 자체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G대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혜란은 정말로 그 아름다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부러웠다. 정우오빠도 S대에 내몰리지만 않았으면 이 학교에 다닐 수도 있었을 텐데, 정우오빠 성적이면 장학금 받아 가며 당당하게 다닐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그런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잠시 밝아지는가 싶던 혜란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지자 정아는 기분 전환도 할 겸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마침 G대 근처의 소극장에서 ‘디어 헌터’를 상영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과 러시안 룰렛 같은 섬뜩한 소재를 다룬 영화인데도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너무 쓸쓸해서 혜란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나중에는 스스로 감정이 북받쳐서 영화는 뒷전으로 미루고 울기만 했다.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극장을 나오니 바깥은 어느새 어둠이 내려와 있었고 눈발은 아직도 약하게 날리고 있었다.

“좀 추운데, 우리 따뜻한 커피 마실까?”

정아는 가까운 곳에 있는 커피숍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그곳은 ‘티파니’ 커피숍이었다. 혜란은 울컥 솟아나는 격정을 억누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가 먼저 아래로 내려갔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이며 출입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디제이 박스며 어둠침침한 조명이며 모든 게 반가웠다. 혜란은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잘 보이는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귀에 익은 팝송이 한산한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종업원이 다가왔다. 정아는 자연스럽게 “커피 둘이요.” 했다. 곧 하얀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나왔다. 정아는 탁자에 있는 예쁜 단지를 열어 설탕을 듬뿍듬뿍 넣은 다음 앙증맞은 찻숟가락으로 오래오래 저어 혜란 쪽으로 밀었다.

“마셔. 기분이 안 좋을 땐 달게 먹는 게 좋대.”

“내 기분이 어때서?”

“너 아까 영화 보면서 울었잖아?”

숨죽인 채 눈물만 꼭꼭 찍어냈는데도 정아를 속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혜란은 말없이 커피만 홀짝였다. 성질 급한 정아는 웬일인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혜란은 고요하고 안정적인 그곳의 분위기에 한껏 빠져들었다. 커피는 달콤했고, 음악은 부드러웠으며, 디제이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평화로웠다. 언제 욕설이 튀어나올지, 언제 재떨이 같은 게 머리 위로 날아올지 몰라 24시간 불안에 떨어야 하는 자신의 집과는 정반대의 세상이었다. 혜란은 실로 오랜만에 마음이 편안하고 자유로워졌다. 그러자 정우오빠 얘기를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이 불현듯 솟구쳤다. 마침 정우오빠 얘기를 꺼내기에 가장 적임자라고 할 수 있는 정아도 바로 눈앞에 앉아 있었다.

“정아야, 정우오빠가 죽었대.......”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깜짝 놀라는 정아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를 자기 손으로 한 번 더 죽이는 것 같아 혜란은 새삼 전율했다. 유서 한 줄도 없이 영원히 침묵하게 된 정우오빠를 떠올릴 때마다 끝내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한 혜란은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자신의 편지 따위가 결과를 뒤집는다거나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혹시 정우오빠한테 좁쌀만 한 희망이나 한줌 위안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하면, 미련스럽게 편지 쓰기를 미루어 왔던 자신을 변기 속에 처박고 싶었다. 정아는 침착하게 혜란의 얘기를 들어 주었다.

“많이 힘들었겠다. 진작 좀 얘기하지 그랬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정아야, 평생을 못 봐도 그 사람이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것과 죽고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너 모르지?”

“그럼, 나야 모르지. 너처럼 지고지순한 사랑을 해 봤어야 말이지.”

그 와중에도 우스갯소리를 던져 심각한 분위기를 좀 완화시켜 보려는 정아의 배려가 울컥 가슴에 와 닿아, 혜란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아는 혜란이 옆으로 와서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확실히 혼자 울 때보다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혜란은 날 잡았다 생각하고 오래오래 울었다. 이번이 마지막 울음이길 바라면서.

 

겨울방학이 끝났다.

소정이는 졸업을 했다. 졸업식 날, 혜란은 선물을 준비해서 학교에 갔지만 소정이 손에 쥐어 주지는 못했다. 소정이와 소정이 부모님을 먼발치에서 발견하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티파니에서 울고 난 후 다 쏟아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을 보는 순간 최초의 충격과 상처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마음이 이런데 가족들은 오죽할까. 그런 사람들 앞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나설 자신이 없어 혜란은 식이 끝나기 전에 밖으로 나와 버렸다.

며칠 후 혜란은 소정이네 집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선물이라도 전해 주자는 마음으로 거기까지 가긴 갔는데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소정이 집까지 걸어가는 길은 한걸음 한걸음이 모두 정우오빠와의 추억이었다. 골목 어귀에서 정아와 하염없이 정우오빠를 기다리던 일도 엊그제처럼 선명했다. 짠! 속았지? 하며 당장이라도 정우오빠가 튀어 나올 것 같아 혜란은 대문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때 정말로 대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그런데 웬 낯선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2층 창문으로 내다보니 누가 계속 집 앞을 왔다 갔다 하기에 나와 봤다고 했다. 혜란이 소정이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그런 사람은 없다고 했다. 알고 보니 소정이네는 이사를 간 것이었다. 정우오빠 장례식 이후 서둘러 집을 처분한 듯했다. 마치 그리 되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혜란은 담담하게 그 집을 물러났다.

졸업하고 이사까지 가 버렸으니 이제 소정이가 연락해 오지 않는 한 둘 사이는 끊어졌다고 봐야 했다. 혜란이 할 수 있는 일은 소정이 편지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정이는 이제 연락을 안 할 것 같았다.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정우오빠를 알고 있는 과거의 모든 사람들과 인연을 끊고 싶어 할 것 같았다. 소정이가 그러고 싶어 한다면 그 결정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혜란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