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로 접어들었다.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은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졌다. 날이 추워지면 운동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혜란도 자칫 느슨해질까 봐 바짝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인적이 드문 새벽길을 걷는다는 건 항상 긴장과 두려움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런 혜란에게 위로가 돼 준 것은 차고 어두운 새벽하늘에 총총 박혀 있는 별들이었다. 그 시린 별들은 꼭 혜란 자신의 모습 같았지만 외롭거나 슬프지는 않았다. 곧 밝고 씩씩한 해가 떠오른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새벽 운동 덕분에 혜란의 내성적인 성향은 나날이 농도가 옅어지고 있었다.
그즈음 또 다시 방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혜란은 열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그 방 기한이 징글징글했다. 마치 온몸을 칭칭 감은 구렁이 같았다. 아버지는 큰오빠와 작은오빠를 불러들였다. 하지만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오빠들이 내놓을 대책이란 애초에 아무 것도 없었다. 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오빠들은 정 안 되면 단칸방이라도 얻어서 옮겨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만 툭 던져 놓곤 돌아갔다. 밖에서 엿듣고 있던 혜란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약 부모님과 한 방을 써야 하는 사태가 생긴다면, 자신이 집을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졸업하기 전에는 절대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었다. 혜란은 만약 자기한테 적금이 또 있다면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내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방세는 신협에서 대출을 받아 간신히 해결했다. 두 달을 질질 끌어오다 집주인이 더는 못 봐 준다며 당장 방을 빼라고 난리를 치자 부모님이 최종적으로 내린 결단이었다. 여기저기 보증을 부탁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비굴하고 안쓰러웠다. 물론 아버지는 그 스트레스를 엄마와 혜란에게 고스란히 풀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자식새끼들 다 필요 없다는 둥, 이 꼴 저 꼴 안 보려면 일찌감치 죽어 버렸어야 했다는 둥, 당장 내일이라도 차도로 뛰어들겠다는 둥, 주사를 부리기 시작하면 연민은 다시 증오심으로 변해 혜란을 괴롭혔다. 엄마라고 다를 건 없어서 툭하면 혜란이 앞에서 원금하고 이자 갚을 일이 까마득하다고 넋두리를 해댔다. 그게 꼭 자기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아 혜란은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한번은 자기가 갚겠다는 말을 불쑥 해 버렸다.
“하이고, 네가? 네가 뭔 수로 그 돈을 갚는단 말이냐?”
“제가 졸업해서 돈 벌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혜란 스스로도 실감은 나지 않았다. 시간으로만 따지면 일 년 남짓 남았을 뿐이지만 하루하루가 백년과도 같은 상황에서 ‘졸업’은 요원해 보이기만 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정우오빠의 대입 시험일은 성큼성큼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입 시험이 드디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혜란은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잃어 버렸다. 사흘 굶은 사람처럼 매가리가 하나도 없는 것이, 영락없이 찬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낙엽 꼴이었다. 주산 검정 시험이 코앞인데도 진드근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툭하면 충동적으로 가방을 싸곤 하였다. 일찍 나왔다고 곧장 집으로 가는 것도 아니어서 하릴없이 길거리를 쏘다니기 일쑤였다. 보다 못해 정아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너 요즘 엄청 이상해진 거 알아?”
“주산 시험 땜에 불안해서 그런가 봐.”
괜히 부정 탈까 봐 정우오빠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재수와 삼수의 무게는 또 다른 것일까. 혜란은 작년에 비해 유독 애가 타고 안절부절못했다. 늪으로 빠져드는 듯, 혹은 서서히 가위눌리는 듯한 증상은 대입 시험 당일이 되자 절정에 다다랐다. 혜란은 하루 종일 절인 배추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정아가 만나자고 전화를 해 왔지만 그날은 왠지 꼼짝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텔레비전에선 온통 대입 시험 이야기뿐이었다. 수험생을 실어 나르는 택시나 오토바이의 활약상, 교문 앞에서 기도하는 학부모들의 모습, 후배들의 응원전, 헐레벌떡 학교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수험생의 모습 등 해마다 봐 왔던 장면들이 이번에도 똑같이 재연되고 있었다. 그리고 작년보다 시험이 쉬웠느니 어려웠느니 하는 수험생들의 소감이 방송되면서 마침내 길고 지루했던 하루가 막을 내렸다.
결과야 어떻든 시험이 끝난 이 순간만은 정우오빠도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을 테니 혜란도 마음을 놓으면 될 텐데 이상하게 불안감은 더 커져만 갔다. 온 나라가 출근 시간을 늦추고 휴교까지 하는 등 대입 시험 하나 갖고 해마다 난리법석을 떠는 것도 괜히 못마땅했다. 당사자들에겐 부담감을, 혜란이처럼 뒷짐 지고 구경만 해야 하는 상고생들에겐 상대적인 박탈감만 더 안겨 줄 뿐인 요란함이었다.
혜란은 새벽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정아가 시험 전에 정우오빠한테 엿이나 찹쌀떡이라도 사다 주라고 채근할 때 못 이기는 척 실행하지 못한 게 무엇보다 후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