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는 방학 끝나기 전에 하다못해 개울에 발이라도 한번 담가야 되는 거 아니냐며 끈질기게 전화를 해댔지만 혜란은 번번이 거절했다. 다 귀찮기만 했다. 그런데 그렇게 거절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전화를 하는 걸 보면 정아도 참 대단했다.
한번은 또 전화벨이 울리기에 당연히 정아인 줄 알고 심드렁하게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원이였다. 지원이는 시골집에 갔다가 올라오는 길이라며 잠깐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혜란은 전화를 끊자마자 집 앞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 나갔다. 지원이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텐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낮의 정류장은 따가운 땡볕이 내리꽂히고 있었지만, 혜란은 어디 그늘이라도 찾아 움직인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다. 지원이가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나와도 될 텐데 왜 미리 나와서 그 고생을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아는 그렇게 귀찮아했으면서 말이다.
기다린 지 40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마침내 지원이가 버스에서 내렸다. 살짝 그을린 얼굴에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지원이가 혜란을 향해 활짝 웃었다. 순간, 그때까지 혜란을 괴롭히던 모든 의구심과 후회는 한방에 날아가 버렸다. 하얀 블라우스에 청치마 차림의 지원이는 한 송이 풀꽃처럼 싱그러워 보였다. 혜란은 지원이를 만나면 G대까지 걸어가거나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 데서 자리를 잡고 놀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원이는 혜란이네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혜란은 눈부신 햇살 아래 있다가 컴컴한 자신의 집으로 지원이를 데리고 들어가기가 조금 망설여지긴 했지만,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 했다.
지원이는 혜란이 그리고 있던 만화를 보더니 탄성을 질렀다.
“와! 너 그림 잘 그린다. 진짜 만화 같아.”
“너도 만화를 보긴 하니?”
“옛날에 우리 언니가 보던 거 어깨너머로 구경한 적은 있어. 너 정말 만화가 해도 되겠다.”
“진짜?”
“그럼. 우리처럼 평범하게 취직할 생각 말고 이 길로 밀고 나가 봐.”
허튼소리는 절대 하지 않는 지원이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왠지 가능성이 더 커 보여 혜란은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너 좋아하는 오빠 있다며? 초콜릿도 줬다던데?”
“어, 어떻게 알았어?”
“설마 정아가 그 비밀을 지킬 거라고 믿은 건 아니겠지?”
“하여간 내가 정아 땜에 못 살아.”
“근데 짝사랑을 하면 좀 손해라는 생각은 안 해 봤니?”
“그걸 내 맘대로 조절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그게 안 되니까 문제지.”
“그게 어려운 일인가?”
“그럼 넌 조절이 되니?”
“되던데?”
지원이는 중학교 때 시골에서 남녀 공학을 다녔는데 그때 마음에 드는 남학생이 있었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남학생도 지원이를 좋아한다고 고백해 왔는데 지원이는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고 한다. 아직 이성 교제를 할 나이도 아니고 공부에 방해만 될 것 같아 그랬다는 것. 그래서 이번 방학 때도 시골에 내려갔다가 그 남학생과 마주쳤지만 모른 척 지나쳤다고 했다.
“너도 좋아했다면서 왜 차갑게 대하니?”
“마음을 받아 준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지금 잠깐 사귄다고 결혼을 할 것도 아닌데. 굳이 모험 걸 필요 없잖아?”
그럼 어차피 죽을 건데 뭐 하러 사냐? 혜란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내가 너무 깍쟁이 같지?”
“그래도 누굴 좋아해 본 적은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 점에서 난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순수하지 않으면 그러기가 힘드니까.”
“순수는 무슨. 미련한 거지.”
점심은 라면을 끓여 먹었다. 엄마가 찬장에 비상용으로 넣어둔 데서 두 개를 꺼냈다. 개수가 줄어든 걸 알면 분명 노발대발할 테지만 모처럼 집에까지 온 지원이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바람 한 점 안 통하는 작은방에서 뜨거운 김이 풀풀 나는 라면을 먹으려니 금세 얼굴과 등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지원이는 불편한 내색 없이 맛있게 먹어 주었다. 이마에 줄줄 흘러내리는 땀도 아랑곳없이 열심히 라면 먹는 모습을 보니 한층 지원이가 가깝게 느껴졌다.
지원이는 해거름이 다 되어 돌아갔다. 지원이를 보내고 돌아오는데 서쪽 하늘에 노을이 유난히 붉었다. 항상 그때쯤이면 하루가 다 갔다는 생각에 기분이 우울해지는데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혜란은 지원이한테 누추한 자신의 집을 다 보여 줬는데도 아무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뿌듯했다. 그건 분명 예전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개학하자마자 주산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방학 전에 봐 두었던 시험인데 몇 번을 다시 봐도 합격자 명단에 혜란의 이름은 없었다. 지원이는 이번에 붙은 한글 타자를 끝으로 모든 급수를 다 거머쥐었다.
“축하해.”
“너무 실망하지 마.”
두 사람은 각각 축하와 위로의 말을 주고받았다.
한바탕 소용돌이가 지난 뒤 교실은 다시 잠잠해졌지만 혜란의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가장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주산 2급에서 두 번이나 떨어진다는 건 정말 뭔가 문제가 있어 보였다. 정아 말대로 연습량보다 요령이나 감각이 문제일지도 몰랐다. 혜란은 입학하던 순간부터 상과 공부가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껴 왔었다. 하지만 다른 애들이라고 처음부터 몸에 척척 맞았을 리는 없으므로 그 핑계를 댈 수는 없었다. 결국 노력이 부족했다는 결론밖에 안 나왔다.
정아는 부기 시험에 떨어졌다. 그런데도 오히려 혜란을 위로하기 바빴다.
“넌 정말 부기 떨어진 게 아무렇지도 않니?”
“뭐 기분이 좋지는 않지. 근데 울고불고 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잖아?”
혜란은 매사에 감정 처리가 빠르고 확실한 정아가 부러우면서도 얄미웠다.
급수의 부담에서 해방된 지원이는 이제 홀가분하게 공부에만 매진하고 있었다. 그런 지원이 옆에서 혜란의 심정은 착잡했다. 혜란은 나름대로 할 만큼 했다. 일분일초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때처럼 오로지 주산 연습에만 매달렸다. 자신의 양심을 걸고 맹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런 혜란을 비웃었다. 그리고 그 충격과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 갔다. 혜란은 결국 급수를 단념하고 싶다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주산은 어떻게든 연습하면 된다지만 학원이나 타자기 대여 같은 물리적인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부기나 타자 급수를 딸 자신은 없었다.
어차피 안 될 거라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그 시간에 만화나 그리는 게 더 생산적일 것 같았다. 여름방학 때 어느 정도 손은 풀었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그려 볼 차례였다. 마침 순정만화 붐이 일고 있었고 출판사들마다 참신한 신인을 모집하고 있었다. 어디든 투고를 해 보려면 일정 분량의 작품이 필요했다. 지금부터 꾸준히 그려 나가다 보면 졸업하기 전까지는 뭔가 결과물을 얻을 수도 있을 듯했다. 그것이 비겁한 현실 도피인지 미래에 대한 획기적인 비전인지 그건 혜란도 알 수 없었다.
혜란은 독서도 다시 시작했다. 무조건 책을 끊고 공부만 하겠다는 발상이 억지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혜란이 지원이한테 당당할 수 있는 순간은 그나마 책을 읽을 때뿐이었다. 사실 첨엔 죽어라 공부만 하는 지원이 옆에서 한가롭게 책이나 읽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책을 멀리한 뒤 자신의 존재 자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 후로 혜란은 생각을 달리 먹었다. 즉, 지원이는 지원이대로 자신은 자신의 신념대로 살면 되는 것이었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혜란은 누구에게도 꿀릴 게 없었다. 그 자신감 덕분에 껄끄러운 지원이와도 적당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