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고사 이후 다시 기말고사를 맞이하기까지 혜란은 쭉 무기력증에 시달려야 했다.
여전히 방과 후에 남기는 했지만 멍하니 넋 놓고 있기 일쑤였다. 공부가 안 되면 차라리 책이라도 읽으면 될 텐데 이상하게 그것도 시들해져 버렸다. 의욕이 꺾인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절감할 즈음 소리 없이 기말고사가 다가왔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혜란은 허겁지겁 시험공부에 돌입했다. 시간에 쫓기고 마음이 급하니까 대충대충 훑어보기만 했다. 그래도 전혀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시험 첫날 첫째 과목은 국어였다. 운 좋게도 전날 풀어 본 문제가 많이 나왔다. 한데 문제 하나가 혜란의 발목을 잡았다. 그건 분명 낯이 익은 문제였다. 그런데 정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틀렸다고 체크만 하고 정답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혜란은 오기가 나서 끝까지 그 문제에 매달렸지만 결국 틀리고 말았다. 아예 모르는 문제였으면 고생은 안 했을 텐데, 어찌나 허탈하고 자신이 한심하던지 혜란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기말고사 내내 혜란은 그 실수를 돌이키며 괴로워했다. 무심한 척 스스로를 속여 보려 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고문이 따로 없었다. 빨리 시험이 끝나고 후딱후딱 시간이 가 버려야 그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덕분에 시험 결과에는 오히려 초연해질 수 있었다. 중간과 기말을 합산해 최종 1학기 성적을 내는데, 이미 중간고사에서 초를 쳤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수학은 당연히 ‘가’였고, 개중 자신 있었던 국어나 영어는 겨우 턱걸이로 ‘우’를 받았으며, 나머지 다른 과목들은 대부분 ‘미’로 장식했다. 애가 어중간하니까 성적도 딱 그만큼인 것 같아서 혜란은 ‘미’가 제일 짜증났다. 지원이는 상업과 두 반 119명 중 5등을 했다.
“하이고, 남아서 공부한다고 맨날 늦게 기어들어 오더니만 겨우 요 점수 받으려고 그 유난을 떨었던 모양이지? 이래 갖고 어디 콧구멍만 한 데라도 취직이나 하겠냐?”
통지표를 받아 든 엄마는 한참을 비아냥거렸다. 차라리 일찍 집에 와서 부업이나 도왔으면 돈이라도 몇 푼 더 벌었을 거라고, 걸레라도 빨고 밥이나 했으면 칭찬이라도 받았을 거라고, 조목조목 따지고 드는 데는 혜란도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통지표를 힐끗 보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윗목으로 툭 던져 버렸다. 네 까짓 게 별 수 없지 뭐, 그런 반응이었다. 혜란은 심한 모멸감을 느꼈지만 당해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방으로 건너오자마자 혜란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부실하게 쌓은 담벼락마냥 몸도 마음도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혜란은 벽에 기대고 앉아 멍하니 책상을 바라보았다. 종이학이 든 유리 상자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청소도 게을리 할 만큼 공부에만 전념했는데, 너무 억울했다. 지원이의 겉모습만 흉내 내면 따라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니, 그 또한 한심하고 창피했다. 공부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된다는데 그게 바로 혜란 자신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성적이나 급수 가지고 취직할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복학을 왜 했는지 후회가 되었다.
혜란은 무릎을 세우고 앉은 상태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닿은 볼이 끈적끈적했다. 이렇게 습기 찬 방에서 한여름을 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숨이 막혔다. 방학 내내 엄마는 아까 했던 잔소리를 무한 반복으로 읊어댈 것이고, 아버지는 또 허구한 날 술을 먹고 와 혜란을 들볶을 것이었다. 더위와 부모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뭔가 몰두할 게 필요했다. 뭘 해야 하나, 혜란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문득 책상 아래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숨어 있는 종이 상자가 눈에 띄었다. 원래 신발 상자였던 거기에는 초등학교 때부터 모아 온 그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드레스 입은 공주, 날개옷을 펄럭이는 선녀, 텔레비전 만화 주인공인 캔디 등 종이는 빛이 바랬지만 그걸 그릴 때의 설렘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중학교 때는 기존 순정 만화를 흉내 내어 혜란이 직접 스토리를 짓고 작품을 만들기도 했었다.
그림을 한 장 한 장 감상하는 동안 혜란의 가슴에는 만화를 다시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활활 불타올랐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혜란의 손끝은 아직도 백지 위에 선을 그을 때의 기분 좋은 감촉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래, 만화를 다시 그리자, 스토리를 제대로 지어 멋지게 완성하자, 그래서 출판사에 작품을 보내 보자, 그런 구체적인 계획들이 머릿속에서 착착 세워지자, 자신의 미래를 자기 손으로 설계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혜란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름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혜란은 그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새벽 운동을 다녀오는 것 말고는 내내 작은방에 틀어박혀 만화만 그렸다. 엄마가 취로 사업 일자리를 얻어 잠시나마 다니게 된 것이 혜란에게는 행운이었다. 엄마가 집에서 부업을 하고 있으면 혜란도 종일 거기에 매달려야 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엄마 대신 설거지나 청소 같은 집안일을 도맡게 됐지만, 해도 해도 끝이 안 나는 부업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혜란은 부지런히 집안일을 끝내 놓고 종이가 펼쳐진 밥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라디오를 들으며 만화를 그리고 있노라면 뭔가 은밀하면서도 대단한 작업을 하고 있는 듯해 마음이 뿌듯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늘 불편하고 찜찜했다. 그래도 명색이 학생인데 이렇게 딴 짓을 해도 되는 걸까 하는 죄책감이 한 번씩 밀려왔던 것이다. 그건 어쨌든 졸업하는 순간까지는 혜란이 떠안아야 할 고통이었다. 책을 볼 때도 갈등을 겪긴 했지만 그래도 독서는 나름 떳떳한 행위라는 위안이라도 있었는데, 이 만화는 정말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지 혜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결과물은 생각만큼 나와 주지 않았다. 하루에 한 장도 겨우 그렸다. 어떤 때는 한 장면 가지고 며칠을 끌었다. 기본기가 너무 부족했다. 그런 실력으로 어쨌든 혼자 끌고 나가야 한다는 건 참으로 외로운 작업이었다. 더구나 방학 동안 단편 하나를 완성하겠다는 목표까지 세운 터였으니 날이 갈수록 마음은 급해지고 속도는 느려졌다. 나중에는 자신만만했던 스토리까지 꽉 막혀 버렸다. 혜란은 내용의 흐름을 읽으려고 지금껏 그려 놓은 그림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낑낑대며 한 장씩 완성했을 때는 그 자체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냉정한 눈으로 다시 보니 전부 찢어 버려야 할 것들이었다.
혜란은 절망을 느꼈다.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일단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조급한 마음을 버리기로 했다. 그러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만화를 그리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뭔가 될 줄 알았을 때는 자신에게든 부모님에게든 당당할 수 있었는데, 그 반대가 되고 나니 대번에 기가 죽어 버린 것이었다. 전에는 새벽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자부심만으로도 충분했으나 이제 그 걸로는 더 이상 성에 차지 않았다. 자의든 타의든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 탓이었다.
그럴 때마다 혜란은 습관처럼 정우오빠를 생각했다. 아무 존재감 없는 자신조차도 자존감에 상처를 받을 때마다 지옥을 경험하는데, 정우오빠는 오죽할까 싶었다. 혜란은 매일 밤 정우오빠한테 편지를 썼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우체통에 넣지는 못했다. 왜 편지 안 썼느냐는 그의 말에 용기를 내서 쓰기는 해도, 막상 다시 읽어 보면 이런 상투적인 말이 무슨 힘이 될까 싶었고, 또 좀 솔직하게 써 볼까 싶으면 정우오빠한테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 봐 겁이 났다. 초콜릿까지 준 마당에 그렇게까지 몸을 사릴 필요는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혜란은 정우오빠만 생각하면 무조건 작아지고 움츠러드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