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 남아 공부를 하려니 두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 배가 너무 고팠다. 점심을 싸와도 그 시간이면 항상 허기가 지는데, 혜란은 안 싸오는 날이 더 많았다. 지원이는 집이 학교 근처라 수업이 끝나면 일단 집에 가서 밥부터 먹고 왔다.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매점이나 학교 밖 분식집에서 배부터 채운 뒤 공부를 시작했다. 그 애들이 소화 시킨다는 명목으로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 때 혜란은 꼬르륵 소리를 감추느라 전전긍긍해야 했다. 안 먹는 만큼 살이 빠지겠지 하는 기대가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부작용이 더 컸다. 집에 가자마자 하루 종일 비워 둔 위장을 채우느라 저녁을 허겁지겁 많이 먹게 되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고통은 공부 그 자체가 주는 막막함이었다. 무조건 교과서만 파고들기로 원칙을 정했지만, 수학이나 상업부기 같은 건 혼자 끙끙댄다고 해결될 과목이 아니었다. 그러니 책을 펼치면 우선 한숨부터 나왔다. 그렇다고 평균을 다 깎아먹어 버리는 수학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다행히 지원이가 옆에 있어 모르는 건 수시로 물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그러기는 미안해서 될 수 있으면 혼자 풀어 보려고 노력했다. 지원이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자기 수학 참고서를 넌지시 혜란이 옆에 놓아두며 언제든 필요하면 보라고 했다.
한번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수학 문제에 부딪혔다. 혜란은 어떻게든 지원이 도움 없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참고서를 봐도 모르겠고 다른 아이들한테 물어봐도 다들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쩔 수 없이 그 문제는 지원이 몫이 되었다. 지원이는 조용히 문제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식을 몇 번 끼적거려 보더니 바로 답을 찾아냈다. 지원이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감탄사를 쏟아냈다. 혜란이 잘 이해를 못하니까 지원이는 하나하나 짚어 가며 꼼꼼하게 풀이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혜란은 울음을 터뜨렸다. 작은방에 몸을 부리는 순간 온몸의 기운이 쭉 빠져 나가며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은 것이었다. 공부란 언제든 마음먹고 덤벼들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파고들면 들수록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는 듯한 위기감에 내내 울고 싶었던 마음이 결국 그날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특히 낮에 그 어려운 수학 문제를 쓱쓱 풀어내던 지원이의 모습은 혜란에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단지 수학 문제 하나를 풀었을 뿐인데, 차갑고 이기적이던 지원이의 평소 이미지가 단번에 사라졌던 것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건 참 멋지고 폼 나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거기 비하면 이도저도 아닌 자신은 너무나 한심하고 초라했다.
또 한편으로는 정우오빠 생각도 났다. 자기 같은 공부 초짜도 이렇게 무섭고 힘이 드는데, 톱을 달리던 사람이 재수 삼수를 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심정일지 가늠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정우오빠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혜란의 설움은 더더욱 북받쳤다. 밖에서 저녁을 하는 엄마한테 들킬까 봐 혜란은 소리 죽여 오래오래 울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남아서 공부하는 일은 차츰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이제 더는 남을까 말까 고민하는 일 없이 수업 끝나면 곧장 도서관으로 향할 수 있게 되었고, 도시락도 엄마가 안 싸 주면 자기 손으로 챙겨서라도 점심만은 거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답답하거나 문제가 잘 안 풀린다고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일도 점점 줄어들어 웬만하면 화장실 갈 때 말고는 자리를 뜨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백퍼센트 지원이의 공이 컸다. 오로지 지원이만 따라했으니까.
그런 어느 날, 도서관 분위기가 유독 고요하고 차분하다 싶어 혜란은 문득 고개를 들어 보았다. 창밖에 보슬보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혜란은 얼른 지원이한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지원이는 창문을 한 번 힐끗 쳐다보았을 뿐 곧장 다시 책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괜히 무안해진 혜란은 하던 공부를 계속하려 했지만 들뜬 마음은 쉽게 잡히지가 않았다. 혜란은 조용히 창가로 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뚝뚝 떨어진 벚꽃에 봄비가 촉촉이 스며들고 있었다.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혜란은 불현듯 책을 읽고 싶다는 충동이 치솟았다. 실은 도서관 책을 마지막으로 반납하던 그날부터 혜란은 책에 대한 갈증에 시달려 왔다. 그건 일종의 금단 현상 같았다. 하루가 다르게 마음이 불안하고 정서가 황폐해져 간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중에 성적만 잘 나오면 다 보상이 될 거라고 믿으며 혜란은 그 현상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날 혜란은 똑똑하게 깨달았다. 책으로 생긴 병은 오직 책으로만 치유될 뿐이라는 걸. 혜란은 당장이라도 도서관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혜란은 가만히 한숨을 내쉰 다음 지원이 옆자리로 다시 돌아와 앉았다.
드디어 중간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도서관은 자리 쟁탈전이 벌어질 정도로 경쟁이 심해졌다. 정아도 모처럼 도서관에 얼굴을 내밀었다. 안 볼 때는 몰랐는데 정아의 얼굴을 딱 보는 순간 혜란은 자신이 그동안 정아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먼저 다가가지는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정아의 눈치만 살폈다. 결국 정아가 먼저 다가왔다. 마침 주변의 아이들은 모두 간식을 먹으러 가고 혜란이 혼자 휑한 책상을 지키고 있었다.
정아는 혜란에게 빵을 내밀었다. 혜란은 말없이 그 빵을 받았다.
“밥이나 좀 먹어가며 하지? 뭐 전교 일등이라도 하게?”
평소와 다름없는 정아의 말투에 혜란은 저도 모르게 쿡, 웃음이 나왔다.
“뭐야, 나 없이도 멀쩡하게 잘 살아 있었네?”
정아의 두 번째 농담으로 둘 사이의 경계는 완전 해제되었다. 실타래처럼 꼬인 문제를 한방에 해결해 버리는 정아의 능력은 정말 탁월했다. 정아는, 진작 손을 내밀고 싶었지만 혜란이의 똥고집을 좀 꺾어 보고자 어떻게든 버텨 봤는데, 이젠 두 손 두 발 다 든다고 했다. 혜란은 정아의 너그러운 성격이 정말 고마웠고 더구나 시험 직전에 화해를 하게 되어 참 다행이었지만 딱히 표현할 용기는 없어 그냥 웃기만 했다.
혜란은 빨리 시험을 치르고 빨리 결과를 보고 싶었다. 이번처럼 열심히 시험공부를 한 적도 없으니 당연 기대가 컸던 것이다. 적어도 1학년 때보다 나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1학년 때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는 성적이 나온 것이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수학이었다. 주산 다음으로 시간을 많이 쏟은 게 수학인데 입에 담기도 민망한 점수를 받았던 것이다. 기초가 없으면 아무리 벼락치기를 해도 안 된다지만 그건 해도 해도 너무 한 결과였다.
설상가상으로 중간고사 전에 쳐 두었던 주산 시험에서도 떨어졌다. 증명사진 찍어서 원서 내랴, 지정된 날짜에 시험 장소 찾아가랴, 시험 한번 응시하는 것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난 뒤라 불합격은 더 아프게 다가왔다.
“처음 쳐 본 거니까 좋은 경험했다 생각해.”
지원이가 위로해 주었다. 혜란이도 그러고 싶었다. 한데 처음이긴 정아도 마찬가진데 정아는 덜컥 붙었다.
“연습만 많이 한다고 되는 건 아닌 거 같아. 요령이 있어야지.”
정아는 나름대로 합격한 비법을 내놓았다. 그건 죽자고 연습한 혜란을 두 번 죽이는 말이었다. 정아가 비꼬려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혜란의 심기는 극도로 나빠졌다. 모든 결과는 그 과정이 말해 줘야 하는데, 별로 열심히 하지도 않은 정아가 합격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안 되었다. 지난 겨울방학 때의 체중 감량 실패에서부터 이번 중간고사와 주산 시험에 이르기까지 번번이 쓴 잔만 마시다 보니 ‘노력한 만큼 거두는’ 게 아니라 ‘노력한 만큼 실패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