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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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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2학년


BY 하윤 2013-06-09

지원이와 가까워지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항상 정아가 혜란이 옆에 껌처럼 달라붙어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지원이와 둘만 있을 때도 별 진전은 없었다. 지원이는 일단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소정이나 정아처럼 말이 많고 싹싹한 짝들만 만났던 혜란으로선 그런 지원이가 처음엔 좀 답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억지로 짝을 배려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방해 받을 일도 없으니까 각자의 일에 집중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놀라운 일이 생겼다.

지원이가, 혜란이한테,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을 ‘먼저’ 꺼낸 것이었다. 이 달의 문화 교실은 ‘닥터 지바고’였다. 정아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혜란에게 달려와 보러 가자고 졸랐다. 혜란은 보러 갈 돈도 없었지만 지원이도 은근히 신경 쓰여 정아의 청을 힘겹게 뿌리쳤다. 거절을 당한 뒤에도 끈덕지게 떼를 쓰던 정아는 결국 풀이 죽어 돌아섰다. 그때만 해도 지원이는 아까운 돈과 시간까지 써 가면서 영화를 보는 것만큼 한심한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입장이었다. 한데 수업하러 들어온 선생들마다 이런 명작은 기회가 왔을 때 봐 두는 것이 좋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니까 지원이의 마음도 슬그머니 흔들린 모양이었다.

“우리도 보러 갈까?”

지원이는 종례가 끝난 뒤 혜란의 의사를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럴까?”

불쑥 승낙부터 해 버린 다음에야 혜란의 머릿속은 실타래가 엉킨 것 마냥 복잡해졌다. 영화비야 준비물 사려고 꿍쳐 둔 돈으로 대체하면 된다지만 정아가 이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할 걸 생각하면 아찔했다. 어째서 앞뒤 재지도 않고 오케이부터 한 것인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혜란은 슬쩍 지원이를 쳐다보았다. 한데 지원이 얼굴을 보니 다시 좀 전의 상황으로 돌아간다 해도 역시 똑같은 대답을 할 것 같았다.

둘은 학교를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또 버스를 타고 극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버스 안을 가득 채운 아이들은 모두 영화 얘기로 떠들썩한데 지원이하고 혜란이만 침묵이었다. 혜란은 혼자서도 잘 떠들던 정아가 문득 그리웠다. 시내에 내려 극장을 찾아 들어가 어두운 객석에 앉고 나서야 혜란은 불안하던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너, 이 영화 잘 알아?”

지원이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혜란은 물 만난 고기처럼 줄줄 읊었다. 감독이 누군지, 어떤 배우가 나오는지, ‘라라의 테마’ 라는 영화 음악이 얼마나 유명한지 등등.

“넌 영화도 안 봤다면서 어쩜 그렇게 모르는 게 없니?”

“으응, 전에 누구한테 들었어.”

그 누구는 바로 정우오빠였다. 소정이네 집에 시험공부 하러 갔다가 정우오빠한테 ‘닥터 지바고’의 줄거리를 듣던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꿈만 같았다. 특히 멀어져 가는 라라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지바고가 얼어붙은 창문을 깨뜨렸다는 부분에선 마치 정우오빠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그 절박한 심정을 잘 표현해 주었었다. 그때 혜란은, 남자가 그토록 섬세하고 자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었다.

“그 사람이 어찌나 실감나게 얘기를 잘 해 줬던지 그 뒤에 원작 소설도 찾아 읽어 봤지만 그때의 감동을 따라오진 못하더라.”

“넌 책도 영화도 진짜 좋아하는구나?”

“넌 안 좋아해?”

“그저 그래.”

“그럼 왜 보러 왔어?”

“선생님들이 자꾸 보라고 하니까 봐야 할 거 같아서.......”

과연, 지원이다운 답변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지원이는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주인공들이 불륜이네?”

“그래도 아름답잖아? 애틋하고.”

“그래 봤자 불륜이지.”

지원이의 엄정한 도덕적 잣대 앞에서 혜란은 할 말을 잃었다. 만약 정아였다면 지금쯤 침을 튀겨 가며 그들의 사랑을 예찬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또 정아가 그리웠다.

그때 거짓말처럼 정아가 눈앞에 나타났다. 몇 명의 아이들과 정신없이 수다를 떨며 화장실로 다가오던 정아는 혜란을 발견하자 환성을 질렀다.

“어! 혜란아, 안 본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혼자 왔어?”

“으응 그게.......”

혜란이 어물거리는 사이 화장실에 갔던 지원이가 손의 물기를 털며 나왔다.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르던 정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러자 혜란은 자기가 정말 무슨 바람이라도 피다 들킨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아는 휙, 등을 돌리더니 뚜벅뚜벅 밖으로 걸어 나갔다. 함께 온 아이들이 우르르 뒤따라갔다. 지원이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무슨 일인지 묻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어둑어둑한 데다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혜란은 참담한 심정으로 비에 젖은 거리를 바라보았다. 비 맞으며 가고 있을 정아를 생각하니 괜히 옆에 있는 지원이한테 화가 났다. 그런 혜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원이는 묵묵히 손바닥을 내밀어 빗방울의 굵기를 가늠했다. 그리곤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는 게 아닌가.

“어, 우산 가져 왔네?”

“아침에 일기 예보 듣고 챙겼어.”

덕분에 다들 극장 입구에서 발이 묶여 동동거리고 있을 때 두 사람은 유유히 그 자리를 뜰 수 있었다. 지원이는 시내 구경이나 좀 하자고 했다. 준비성이 철저한 지원이가 자신의 친구라는 사실에 기분이 우쭐해진 데다, 칼같이 귀가를 서두를 줄 알았던 지원이가 먼저 그런 제안을 해 오니, 서슬 퍼런 엄마의 독설이 귓가에 쟁쟁거리는데도 불구하고 혜란은 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둘은 느릿느릿 시내를 거닐었다. 지원이는 비 맞는다며 혜란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혜란은 엉겁결에 팔짱을 끼게 되어 당황스러웠지만, 지원이와 조금 더 친밀해진 느낌이 들어 기분은 좋았다. 걷다 보니 웅장하고 화려한 백화점이 눈앞에 나타났다. 꼭대기의 네온사인은 비에 젖어서인지 한층 운치 있게 빛나고 있었다. 혜란은 그 곳이 왠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망설였지만, 지원이는 씩씩하게 출입문을 밀어젖히고 들어갔다.

혜란은 백화점이 처음이라는 티를 안 내려고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바로 들통이 났다. 그 움직이는 계단에 언제 발을 올려놓아야 할지 혜란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원이는 첨엔 무서워도 한번 해 보면 별거 아니라며 혜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층마다 한 바퀴씩 다 돌고 나서 지원이는 저녁을 먹자고 했다. 지하로 내려오니 온갖 음식 냄새들이 코를 자극했다. 혜란은 라면을 시켰다. 지원이는 우동에다 떡볶이를 추가로 시켜 나눠 먹자고 했다.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라 두 사람은 그릇을 싹싹 비웠다.

백화점을 나왔을 때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혜란은 자기가 탈 버스는 아직 안 왔다고 둘러대며 지원이를 먼저 태워 보냈다. 그런 다음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실은 좀 전에 먹은 라면 값이 집으로 돌아갈 차비였던 것이다. 촉촉하게 젖은 밤거리를 걸으며 혜란은 골똘히 생각해 봤다. 어째서 지원이 말이라면 꼼짝을 못하는 건지.

 

다음날 등교하자마자 혜란은 정아네 교실로 갔다.

정아는 괜찮다고 했지만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사과는 열 번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왜 자기랑 안 가고 지원이랑 갔느냐고 묻는 데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지난밤부터 내내 생각해 봤지만 그건 혜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너랑 친해지는 건 너무 힘들어.......”

정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또 멀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마음을 닫고 있을 거야? 이젠 정말 지친다.”

정아가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혜란은 어떤 책망도 달게 받을 생각이었지만, 마음을 닫고 있다는 그 말만은 인정할 수 없었다. 혜란이 정우오빠 얘기를 유일하게 털어놓은 사람이 바로 정아였다. 그런데 여기서 뭘 더 어쩌란 말인가. 정아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어서 혜란은 그냥 교실을 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