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란은 뿌리가 뽑힌 나무마냥 자포자기 상태에서 개학을 맞았다.
개학하자마자 학년말 시험을 치러야 했는데 거기에 감기 몸살까지 겹쳐 버렸다. 며칠 견디면 낫겠지 했는데 상태는 갈수록 심해졌다. 몸살도 몸살이지만 혜란은 귀가 더 문제였다. 몸에 탈이 나면 귀가 평소보다 백배는 더 아팠다. 바늘 끝으로 쿡쿡 찌르고 날카로운 삽으로 후벼 파는 것 같은 그 고통은 정말 당하지 않고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었다. 통증은 특히 밤에 절정을 이루었다. 혜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귀를 꼭 감싸 쥐고 제풀에 지쳐 떨어질 때까지 멍하니 누워 있거나, 미친년처럼 머리를 쥐어뜯거나,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것밖에는 없었다.
하루하루 죽을힘을 다해 버티면서도 부모님한테는 알리지 않았다. 적금 사건 이후 혜란은 부모님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마주앉아 밥을 먹어야 할 때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시위를 벌이는 중인데, 뜬금없이 나 아프니까 어떻게 좀 해 주세요, 하기는 너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상태가 심상치 않기는 했다. 단순한 감기 몸살이 아니라 온몸의 기능이 동시에 멈춰 버린 느낌이었다. 사실 봉제 공장을 그만둔 이후부터 지난 5개월여 동안은 숨 돌릴 틈도 없었다. 너무나 두려웠던 복학, 야간부행의 좌절, 학교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정우오빠의 시험 거부, 공중 분해된 적금, 그리고 운동 후의 참담한 결과까지....... 그렇게 차곡차곡 누적돼 왔던 엄청난 긴장과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폭발해 버린 것 같았다.
일주일간의 시험이 끝나던 날, 혜란은 집에 오자마자 그대로 쓰러졌다. 시험을 치르는 동안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그럴 명분이 사라지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혜란은 열이 펄펄 끓는 상태에서 몇 번이나 기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외출했던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는 쌀을 씻으며, 사람이 왔는데 내다보지도 않는다고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혜란이 꼼짝을 안 하자 엄마는 소리를 꽥 질렀다.
“뭐 한다고 들어앉아서 꼼짝도 안 하냐? 얼른 나와서 걸레라도 빨지 않고!”
혜란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바깥 공기를 쐬니 조금 기운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몇 발짝 떼기도 전에 그 자리에 픽 주저앉아 버렸다. 머리가 핑 내둘리면서 골이 빠개지는 것 같았고 귀는 폭탄을 맞은 듯 형용할 수 없는 아픔으로 욱신거렸다.
“엄마야, 쟤가 왜 저래?”
엄마가 부엌에서 달려 나왔다. 엄마는 혜란을 방에 데려다 눕혀 놓고, 이렇게 아프면서 미련스럽게 왜 말을 안 했냐는 둥, 병원은 시간이 늦었으니 약국이라도 가봐야겠다는 둥, 혼잣말을 하며 동전을 긁어모았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자기 때문에 허둥대는 엄마를 보니 좀 위안이 되었다. 약을 사 온 엄마는 어떻게든 밥부터 먹이려고 했지만 혜란은 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엄마는 약이라도 먹고 자라고 했다. 혜란은 알약 서너 개와 물약 하나를 겨우 입에 털어 넣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어지러워서 단 일초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서서히 약기운이 돌면서 혜란은 의식을 잃어 갔다. 그때 어떤 결심 하나가 섬광처럼 혜란의 뇌리를 스쳐 갔다. 이번에 낫기만 하면 정말 적극적으로 살아야지. 앞으로 다시는 한심하고 무기력하게 살지 말아야지.......
그날을 정점으로 혜란의 몸은 차츰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전날, 혜란은 정아 손에 이끌려 시내로 나갔다.
정아는 동네 친구, 초등 친구, 펜팔 친구 등 남자 친구가 많았는데, 그들에게 골고루 은혜를 베풀기 위해 초콜릿을 사러 나간 것이었다. 가게 안은 여학생들로 바글바글했다. 혜란은 바구니를 들고 정아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초콜릿은 모양과 크기는 물론 색깔도 천차만별이어서 구경만 해도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혜란은 붉은색 하트 모양의 초콜릿 상자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크기에 요란하거나 화려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다. 이것저것 정신없이 골라 담던 정아는 혜란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너도 사. 그 오빠한테 주면 되잖아?”
“미쳤어?”
혜란은 펄쩍 뛰었지만 손은 어느새 그 상자를 요리조리 살피고 있었다. 정아는 잽싸게 그걸 낚아채서는 자기 것과 함께 계산대에 올려 버렸다.
“왜 그래? 나 돈도 없단 말이야.”
“걱정 마. 내가 사 줄게.”
지금껏 혜란은 정아한테 떡볶이 하나도 허투루 얻어먹지 않았다. 신세를 지면 갚아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못 이기는 척 받았다. 그 앙증맞은 초콜릿 상자를 두고는 발길이 안 떨어질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걸 정우오빠한테 준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주고 싶다는 상상만 해도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은데, 직접 전해 준다는 건 목숨이 두 개가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아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 소리야? 샀으면 줘야지. 그냥 썩히려고 샀냐?”
다음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정아는 다짜고짜 혜란에게 앞장서라고 했다.
정우오빠 얼굴도 볼 겸 따라가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건 마치 하늘의 별을 따 주겠다는 말처럼 황당하게 들렸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결과야 어떻게 되든 정아가 하자는 대로 한번 맡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정아한테 넘어가면 문제가 달라질 것 같았다. 혜란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정아는 일사천리로 각본까지 짰다.
“일단 우리 둘이 그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그 오빠가 나타나면 우연히 만난 것처럼 구는 거야. 그 동네 사는 친구한테 놀러 왔다 돌아가는 중이라고 하면 되겠다. 그러면 그 다음부턴 이 언니가 화려한 말발로 착착 진행할 테니까 아무 걱정 마.”
“초콜릿을 주면 고백하는 게 되잖아? 그건 싫은데.......”
“그거 준다고 다 사랑 고백이면 이놈 저놈 몽땅 퍼 준 나는 뭐냐? 그냥 친구 오빠니까 가볍게 주는 걸로 하면 되지. 마침 쓰고 남은 게 있어서 주는 것처럼.”
어떻게 그런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지 혜란은 진심으로 정아가 존경스러웠다. 그리하여 둘은 정우오빠가 집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진을 쳤다. 정우오빠네 동네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혜란의 가슴은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쳤다. 근데 거긴 소정이네 동네이기도 했다. 화들짝 놀란 혜란은 당장 철수하자고 했다. 정아는 그때도 각본대로 하면 되지 뭘 걱정이냐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래저래 정아는 그날의 작전에 있어 꼭 필요한 존재로 부상해 있었다.
하지만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웠음에도 두 사람이 놓친 게 하나 있었다. 정우오빠가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 오빠가 다니는 독서실은 어딘데?”
“주소는 아는데 집에 있어. 여기서 가까운 데라고 한 것 같은데.......”
“집 근처라면, 때 되면 밥은 먹으러 오겠네? 일단 기다려 보자.”
그렇게 가닥을 잡자 기운이 쭉 빠졌다. 그때 시각이 3시 40분이었기 때문이다. 점심때도 아니고 저녁 먹을 시간은 더더욱 아닌 정말 어중간한 시간대였다.
“혹시 알아? 간식이라도 먹으러 올지.”
역시 정아는 매사에 낙관적이었다. 혜란도 정아처럼 느긋하게 대처하기로 마음먹었다. 수다를 떨다 보니 두어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하지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면서 둘의 기세는 차츰 꺾여 갔다. 혜란은 정아한테 미안해서 그만 가자고 했다. 정아는 여태 기다린 게 아까워서라도 못 간다고 우겼다. 그런 정아가 속으로는 고마웠다. 순식간에 사방이 깜깜해졌고 가로등이 켜졌다. 정아도 혜란도 더는 말할 기운도 없어서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이 절정에 다다른 것이었다. 정아는 어디 가서 뜨거운 어묵이라도 사 오겠다고 했다. 혜란이 같이 가겠다니까 그 사이에 정우오빠를 놓치면 어쩔 거냐며 정아는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혜란 혼자 남게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혼자 그러고 있다 정우오빠를 만나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혜란은 당장 정아를 뒤따라가기로 했다. 한데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태 기다린 것도 아까웠지만 큰일이 날 때 나더라도 정우오빠를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보고 싶다는 걸 툭 까놓고 인정해 버리니까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참아 왔나 싶을 정도로, 꼭꼭 감춰 두었던 그리움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래 기다려 보자. 얼마 전 죽다 살아났을 때 결심하지 않았던가, 적극적으로 살겠다고.
하지만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보니 다시 자신이 없어졌다.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낯설고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란은 후다닥 정아가 사라진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급하게 모서리를 꺾다가 누군가와 부딪혀 버렸다. 혜란은 상대의 얼굴을 볼 틈도 없이 고개 숙여 사과부터 했다.
“미, 미안합니다.......”
“혜란이?”
놀랍게도 부딪친 사람은 혜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혜란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우오빠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혜란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정우오빠가 놀란 눈으로 우뚝 서 있었다.
“혜란이 맞구나?”
“아, 네.......”
“소정이 만나고 가는 길이니?”
“네. 아, 아니요.”
“그럼?”
정우오빠의 눈이 반짝였다. 정아의 화려한 말발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아는 없고 혜란의 머리는 쥐가 나려 하고 있었다.
“저기, 이 근처에, 친구....... 집이 있어서, 놀다 가는 길이에요.”
“이 동네에 소정이 말고 친구가 또 있었나?”
“네. 이번에 한 반이 된.......”
“그렇구나.......”
서로 말이 끊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정우오빠가 말했다.
“소정이는 안 보고 그냥 갈 거니?”
“아, 저....... 오늘은 너무 늦어서 다음에.......”
“그래? 그럼....... 잘 가.”
“안녕히 계세요.”
혜란은 꾸벅 인사를 한 다음 돌아섰다. 몇 시간이나 기다려 놓고 단 몇 초 만에 끝나 버린 만남이, 정작 정우오빠의 얼굴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것이, 바보같이 말을 더듬기만 했던 것이, 혜란은 못내 아쉽고 억울하고 부끄러웠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정우오빠의 뒷모습이라도 한 번 더 봐야 했다. 하지만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목에 깁스라도 한 듯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혜란은 천천히 몇 걸음을 더 가다가 죽을힘을 다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그 상태로 얼어붙어 버렸다. 가고 없을 줄 알았던 정우오빠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던 것이다. 혜란은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정우오빠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너 또 걸어갈 거지?”
뭐라고 해야 하는데, 입도 얼어붙었다.
“가자. 바래다줄게.”
혜란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내가 좀 걷고 싶어서 그래.”
정우오빠가 앞장섰다. 혜란은 할 수 없이 뒤를 따랐다. 정아는 그때서야 붕어빵 봉지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눈치 빠른 정아는 정우오빠와 혜란을 힐긋 쳐다보고는 옆으로 잽싸게 물러나며 몰래 브이 자를 그렸다. 혜란은 난처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정아를 지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