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데이는 1월 1일로 정해졌다.
혜란은 방학 다음날부터 바로 시작하고 싶었지만, 정아가 이왕이면 폼 나게 1986년의 첫날에 시작하자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 드디어 약속한 날 새벽, 정아와 만나기로 한 건 6시인데 혜란은 4시 30분에 잠이 깨고 말았다. 그것도 자정이 훨씬 지나도록 잠을 못 이루다가 겨우 잠깐 눈을 붙인 것이었다. 좀 더 자려고 했지만 정신은 더 말똥말똥해졌다. 계속 뒤척여 봤자 헛수고일 것 같아 혜란은 불을 켜고 일기장을 끌어당겼다. 지난밤 쓰다 만 페이지에는 새해에 대한 각오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열 몇 가지나 되는 결심들 중에서 외적으로는 성적 향상과 운동을 해서 살을 빼는 게 최고의 목표였고, 내적으로는 성격을 고치는 것이 최대의 과제였다. 그렇게 한 자 한 자 일기장에 써 내려간 자체가 이미 변화의 시작인 듯해서 혜란은 좀 우쭐해졌다.
하지만 막상 약속 시간이 다가오니까 마음이 약해졌다. 무엇보다 그 시간대에 바깥에 나가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깜깜한 새벽길에 사람이 없어도 무서울 것 같고 반대로 사람이 있어도 간이 철렁할 것 같았다. 불길한 상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계속 그러고 있다가는 생각에 지배당해 정말로 꼼짝달싹 못할 것 같아 혜란은 일단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런 다음 기계적으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깜깜했다. 혜란은 바짝 긴장하며 신발을 찾아 신었다. 혹시 세숫대야라도 걷어차게 되면 큰방에 자고 있는 부모님이 깰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조심 대문까지 걸어갔다. 낡고 녹슨 대문은 아귀가 맞지 않아 밤에도 잠그지 않고 닫아만 놓았다. 문제는 여닫을 때마다 끼이이익 하는 기분 나쁜 쇳소리가 난다는 점이었다. 그 소리를 최대한 죽이려면 대문의 밑바닥이 문턱에 닿지 않게 양손으로 꽉 잡아 올려서 천천히 이동시켜야 했다. 혜란은 겨우 대문을 닫고 한숨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혜란의 입에선 저절로 탄성이 새 나왔다. 눈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새해 첫날 그것도 운동을 처음 시작하는 날 눈이 내리다니, 좋은 징조가 아닐 수 없었다. 혜란은 가벼운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가로등 불빛 아래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정아와 만나기로 한 사거리까지 와서도 계속 걷고 싶어 혜란은 같은 장소를 뱅뱅 돌았다. 정아는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알람 맞춰 놓는 걸 깜박했다고 했다. 눈이 와서 특별히 용서해 주겠다는 혜란의 말에 정아는 까르르 웃었다.
둘은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은 하얀 눈을 경쟁하듯 지르밟으며 체육공원까지 걸어갔다. 온 사방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혜란은 괜히 기분이 들떠 말이 많아졌다. 혼자만의 비밀이었던 정우오빠의 이야기를 꺼낸 것도 순전히 눈 때문이었다. 정아는 그런 엄청난 짝사랑을 품고 있으면서 어떻게 지금껏 아무 말도 안 할 수 있었느냐며 놀랐다. 앞집 남학생과 눈만 마주쳐도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는 정아로선 혜란이 이상할 만도 했다. 사실 혜란 자신이 생각해도 정우오빠에 대한 몰입은 너무나 맹목적인 것이었다. 왜 그리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설명이 불가능했다.
정아는 혼자만 아파야 하는 짝사랑 따위는 당장 그만두라고 했다. 하지만 그 눈 오는 새벽 산책길에 정우오빠 얘기를 하고 그의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혜란은 무한한 기쁨과 낭만을 느낄 수 있었다.
눈 덕분에 첫 테이프는 잘 끊었지만 새벽 운동이란 게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정아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매번 지각을 했다. 결국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던 정아는 나흘 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먼저 부추겨 놓고 제멋대로 발을 빼 버린 정아한테 혜란은 처음으로 화가 났다. 정아가 굳이 운동을 안 해도 되는 날씬한 몸매여서 더 심사가 꼬였는지도 몰랐다. 거기다 홀로 남은 혜란의 의지를 시험하겠다는 듯 기온까지 뚝 떨어졌다. 변함이 없는 건 요란하게 울리는 자명종뿐이었다. 자명종에선 새소리가 났다. 첨엔 새벽을 깨우는 그 소리가 상쾌하고 좋았다. 그런데 정아가 빠지고 혜란도 점점 꾀가 나면서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돼 버렸다.
혜란은 매일 자명종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자명종이 울리는 즉시 껐다가 그대로 다시 잠들어 버리는 경우를 몇 번 당한 뒤로는 완전히 깰 때까지 절대 끄지 않기로 규칙을 정했다. 아무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로 귀를 막아도 바늘로 찌르는 듯 날카롭게 귀를 파고드는 새소리를 당해낼 재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버티는 그 몇 분 동안에도 온갖 달콤한 유혹에 시달려야 했다. 딱, 오늘 하루만 쉬어. 이렇게 추운 날 나가면 오히려 감기만 걸릴 걸.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런 날씨에 고생을 사서 해? 살 빼는 게 무슨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잖아? 실컷 자고 차라리 밥을 한 끼 굶으면 되잖아. 그런 유혹들이 활개를 치는 동안 혜란의 ‘의지’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그러나 혜란은 자신을 움직일 결정적인 한 마디를 알고 있었다. 지금 안 나가면, 과연 오늘 하루 마음이 편할까? 그건 혜란에게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운동을 빼먹었다는 자책감은 다음날 운동을 나가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스스로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당장의 안락한 수면을 포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며칠 지나면 적응이 될 만도 한데 거의 매일 갈등에 시달려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듯 따뜻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기까지가 새벽 운동의 가장 힘겨운 단계인 건 분명했다.
일단 대문만 나서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짐승처럼 웅크린 어둠과 매서운 바람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첫 번째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자신감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혜란은 밖으로 나오면 무조건 뛰었다. 뛰다가 숨이 차면 걷기도 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희미한 외등만이 띄엄띄엄 서 있을 뿐인 새벽길을 홀로 가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가끔 뒤에서 뭔가가 따라오는 듯 공포가 엄습할 때면 정아 생각이 간절하게 났다. 하지만 한 번도 제 시간에 온 적이 없는 정아를 생각하면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것이 편하긴 했다. 정아를 기다리며 화를 억누르는 일이 더 피곤했던 것이다.
운동을 다닌 지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 혜란은 체육공원 광장에서 에어로빅을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은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혜란은 다음날부터 당장 에어로빅 시간에 맞추어 나갔다. 힘은 들고 재미는 없는 줄넘기나 달리기만 하다가 에어로빅을 만나니 새로운 의욕이 솟았다. 그 추운 날씨에도 몸에 착 달라붙는 에어로빅복을 갖춰 입고 단상에 오른 강사의 열정과 스피커에서 쾅쾅 울려 퍼지는 팝송은 보고 듣기만 해도 황홀하고 신이 났다.
하지만 중학교 때 무용 시간 이후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은 그때가 처음인지라 맨 뒷줄에 서 있는데도 어찌나 어색하고 부끄러운지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어차피 강사를 비추는 등불 말고는 사방이 어둑어둑해서 잘하든 못하든 상관이 없는데도 혜란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혜란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남들의 시선보다 자신의 시선이 더 문제라는 것, 마음이 갇혀 있으면 몸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혜란은 우선 뻔뻔해지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혜란은 중간 줄까지 진출할 만큼 실력이 늘고 자신감도 붙었다.
에어로빅은 방학 동안의 하루 일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운동을 다녀와 아침을 먹고 나면 그제야 얼었던 몸이 녹으면서 졸음이 스르르 밀려왔고, 잠깐 눈 좀 붙이고 어영부영 하다 보면 금세 짧은 겨울 해가 넘어가 버렸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숙제나 공부 같은 걸 게을리 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언짢았지만 예전처럼 심한 자학에는 빠지지 않았다. 뭐든 몰두하는 일이 한 가지라도 있으면 덜 괴롭고 허전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엄마는 사철 다양한 부업을 했는데 겨울에는 주로 밤을 깎았다. 일거리가 들어오면 혜란 역시 만사를 제쳐 두고 거기에 매달려야 했다. 밤은 우선 겉껍질을 벗긴 다음 물에 불려 밤 깎기 전용 칼로 속껍질을 쳤다. 밤은 킬로그램 당 얼마씩 값을 쳐 받았는데, 껍질을 벗기기 전과 후의 무게가 심하게 차이 나면 받을 돈에서 제해졌다. 두 사람이 종일 붙어 앉아 허리가 끊어지도록 작업하는 것에 비해 손에 쥐어지는 돈은 형편없었다. 그러나 다들 한 푼이 아쉬운 처지라 밤을 실은 차가 오면 동네 아줌마들은 서로 일감을 많이 받으려고 신경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