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이 다가올수록 수업 시간이 널널해졌다.
혜란은 기를 쓰고 책만 읽었다. 그것 말고는 불안한 마음을 다독일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같은 페이지를 펼쳐 놓은 채 끝없는 상념에 젖어 있기가 일쑤였다. 그 상념의 중심에는 늘 정우오빠가 있었다. 전교 일등을 달리던 사람이 재수에 이어 삼수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이고 어떤 고통일지 혜란으로선 도저히 상상도 안 되었다. 그래서 늘 미궁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혜란은 소정이 아버지가 미워졌다. 자기 아버지 같은 사람만 아니면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다 존경스러워 보이는 혜란의 눈에, 소정이 아버지는 그야말로 만점 아버지였었다. 돈 잘 벌고 가정에 충실하고 무엇보다 술을 안 마신다는 점이 최고 점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정우오빠한테 삼수까지 강요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빵점 아버지로 추락해 버렸다. 술 먹고 때려 부수는 것만 폭력이 아니라 독재와 독선도 엄청난 폭력이라는 것을 소정이 아버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정우오빠가 걸어가야 할 일 년이라는 시간은 혜란이 생각해도 아득하고 막막해 보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죽을 둥 살 둥 다녀온 길을 또 가야 한다니. 혜란은 진심으로 그 길에 동행이 돼 주고 싶었다. 하지만 혜란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한숨이나 쉬며 혼자 끙끙대는 것밖에 없었다. 미친 척 달려가서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혜란의 성격에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이 거기만 이르면 혜란의 머릿속은 항상 과부하가 걸려 버렸다. 머리를 식히려면 다시 책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책을 펼치면 정우오빠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 우리 방학 동안 뭐 하지? 운동이라도 할까?”
겨울방학에 들어가던 날, 정아는 잔뜩 흥분했지만 혜란은 그저 시큰둥했다.
담임이 종례를 하러 들어왔다. 그런데 평소에 별 표정이 없는 담임이 웬일인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담임의 뒤를 이어 분희가 들어오는 게 아닌가. 반 아이들 모두 환성을 내질렀다. 분희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분희는 봉투 속에 든 걸 꺼내 앞줄에서부터 한 장씩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먼저 받은 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기쁨과 감동으로 어우러졌다. 드디어 혜란도 받았다. 하얀 사각의 봉투 속에는 예쁜 크리스마스카드가 들어 있었다. 색종이를 오려 붙이고 반짝이 가루를 뿌려 직접 만든 카드였다. 메모도 있었다. ‘혜란아, 나는 네가 부러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다시 복학을 했잖아? 나도 하루빨리 너처럼 학교로 돌아오고 싶다. 메리 크리스마스! 분희가.’ 실제로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 진솔한 편지였다. 그런 분희한테 경계심부터 먼저 가졌던 게 미안해서 혜란은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분희를 보는 순간 혜란은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다. 전에 본인이 한 말대로 진짜로 학교에 놀러 왔다는 사실이 일단 놀라웠고, 분희로 인해 또 다시 부닥치게 될 자괴감이 지레 두려워진 것이었다. 친한 사이에서나 주고받을 법한 크리스마스카드를 배급 하듯이 반 전체에 돌리는 것도 좀 거슬렸다. 정아도 팔짱을 끼고 한 마디 했다.
“쟤는 저런 걸로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은가 보지?”
하지만 카드를 받고 메모를 읽는 순간 정아도 혜란도 입이 쏙 들어갔다. 분희의 ‘진심’은 그 모든 불경한 생각들을 덮어 버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썰렁했던 교실은 어느새 훈훈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분희의 핼쑥한 얼굴에도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아픈 몸으로 60여 장의 카드를 만들고 그 한 사람 한 사람한테 꼭 맞는 편지를 쓰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분희는 그걸 해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 기쁨과 보람을 당당하게 누리고 있었다. 사소한 거 하나에도 손익부터 따지고 보는 자신으로선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지라고 혜란은 생각했다.
분희는 야윈 손을 오래오래 흔든 뒤 교실을 나갔다. 복도에는 분희의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보호자 없이는 외출조차 힘든 분희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자신은 뭔가 하는 회의가 밀려왔다. 사실 전에 분희가 떠날 때도 느낀 바가 컸는데 그냥 흐지부지돼 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뭔가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감이 몰려왔다. 더는 이런 한심한 모습으로 살 수 없다는 오기이기도 했다.
마침 새로운 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언가를 결심하기에는 아주 좋은 시점이었다. 혜란은 가방을 싸느라 분주한 정아를 붙잡고 외쳤다.
“운동, 언제부터 시작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