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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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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학


BY 하윤 2013-06-02

분희는 고맙게도 짝까지 선물하고 갔다.

분희의 빈자리를 채우느라 한 칸씩 자리 이동을 한 결과 혜란에게도 짝이 생긴 것이다. 짝은 공교롭게도 정아였다. 복학한 첫날 말을 걸었다가 무안을 당하고도 정아는 꾸준히 혜란에게 관심을 보여 왔었다.

“넌 꼭 책에 굶주린 애 같다?”

“쉬는 시간은 쉬라고 있는 거고, 점심시간은 밥 먹고 소화 시키라고 있는 거야. 넌 어떻게 주구장창 책만 보니?”

“넌 시간이 아까워서 화장실도 안 가지?”

짝이 되자마자 정아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짜 신기해서 하는 말들이었다. 혜란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었다. 공장에 다니는 동안 가장 그리웠던 게 책이라고, 학교 도서관의 책을 몽땅 읽어치우는 게 졸업할 때까지의 목표라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정아가 뒤로 넘어갈지도 모르는데.

“근데 넌 권장 도서만 보냐? 하이틴은 안 봐?”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아, 제목만 봐도 짜증난다.”

정아의 깐죽거림은 계속되었지만 이상하게 밉지는 않았다. 한때 소정이와 혜란은 하이틴 로맨스의 열혈 독자였다. 모든 능력을 완벽하게 갖춘 남자와 청순한 여주인공의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는, 열권이고 백 권이고 똑같은 스토리에 빤한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중독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게 무슨 쓸데없는 시간 낭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정이도 비슷한 시기에 식상함을 느꼈다. 그래서 둘은 손가락 걸고 다신 안 보기로 맹세까지 했었다.......

“야,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 좀 해라. 왜 듣기만 해? 네 생각은 없는 거야?”

“응?”

예전 일을 조용히 회상하고 있던 혜란은 정아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생각이라면 머릿속이 터질 정도로 차고 넘쳤다. 다만 그걸 밖으로 끄집어내 표현한 적이 없을 뿐. 왜냐 하면 자신은 소심하고 과묵하고 내성적인 애니까. 언제부터 그런 애가 되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자기는 그런 애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고,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인다고 믿었다. 너도 네 생각을 좀 말해 봐, 라고 해 준 건 정아가 처음이었다. 전에 수연이의 화통한 웃음소리를 듣고 자신은 그렇게 소리 내서 웃어 본 적이 없다는 걸 불현듯 깨달았을 때처럼, 또 한 번 스스로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 혜란의 머리를 스쳤다. 어쩌다 자기는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는 당연히 가난과 자격 미달의 부모님 때문이었다. 솔직히 자신처럼 불우한 환경에서 소정이나 분희 같은 성격이 형성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럼 자기보다 더 처지가 막막했던 수연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수연이는 타고났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럼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자기 삶의 행불행을 좌우하는 데 성격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면 그걸 유리한 쪽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혜란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사실, 성격이 인생을 바꾼다거나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렸다거나 하는 말은 수없이 보아 왔던 구절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구체적으로 가슴에 와 닿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변해야 하지? 혜란은 난감한 표정으로 정아를 쳐다보았다.

 

정아는 몇 마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아이였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떠들다가도 종일 말 한 마디 안 할 때도 있는가 하면, 얌전하게 치마를 입고 왔다가도 그걸 둘둘 말아 올려 복도에서 말 타기를 할 만큼 선머슴 같기도 했다. 반 아이들 전부와 잘 어울리면서도 정작 화장실 같은 데는 홀로 다녔다. 정아와 짝이 될 때 혹시 너무 귀찮게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막상 있는 듯 없는 듯 무덤덤하게 혜란을 대하는 것도 의외의 모습이었다.

그런 어느 날, 정아와 가까워지게 된 사건이 하나 생겼다. 5교시 때, 주산 선생이 자습을 지시하고 자리를 비우자마자 정아는 가방에서 하이틴 로맨스를 꺼냈다. 혜란도 읽다가 넣어 둔 책을 보고 싶었지만, 다른 애들은 쉬는 시간에도 주산 연습을 열심히 하는데, 자기는 그렇지도 못하면서 수업 시간에까지 소홀히 하면 안 될 것 같아 꾹 참고 수판을 튕겼다. 그렇게 별일 없이 5교시가 끝나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아가 읽던 책이 공중으로 번쩍 들렸다.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오던 주산 선생이 정아의 책을 압수한 것이었다. 정아가 깜짝 놀라는 걸 보고 혜란도 거의 동시에 놀라 동작을 멈췄다. 주산 선생은 책을 들고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정아가 벌떡 일어나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책 돌려주세요.”

아무 것도 모른 채 연습이 한창이던 아이들이 그제야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뭐?”

“책 돌려 달라고요.”

정아는 또박또박 말했다. 주산 선생은 기가 막힌 듯 허, 하고 웃었다. 하지만 정아는 밀리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교실을 가득 채웠다. 주산 선생은 말 섞기도 싫다는 듯 손짓으로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정아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가라는 말 안 들려?”

“.......”

“나가라고!”

“.......”

“지금 당장!”

주산 선생은 부르르 떨면서도 끝까지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냉정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그 모습이 더 조마조마하고 무서웠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버티고 있던 정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전 못 나가겠습니다.”

“.......!”

정아의 폭탄 발언에 교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산 선생과 정아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폭발할 것 같은 팽팽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산 선생이 한 발짝 물러났다. 책을 찾고 싶으면 방과 후에 교무실로 오라는 말을 남긴 채 조용히 교실을 떠난 것이다. 주산 선생이 나가자 아이들의 웅성거림은 더 거세졌는데, 당사자인 정아는 태연했다.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종례 후, 담임은 정아를 교무실로 데리고 갔다. 혜란은 그냥 갈까 하다가 정아를 기다려 주었다. 얼마 후 돌아온 정아는 책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책 받았네? 별일 없었어?”

“담임한테 잔소리 실컷 듣고 주산한테 억지로 사과했지 뭐.”

“너 아까 정말 대단했어.”

“자유 시간이 뭔데? 자유롭게 쓰라는 거 아니야? 그래 놓고 왜 지랄이냐고. 자기도 수업 시간에 자기 볼일 멋대로 봐 놓고.”

“자유 시간이 아니라 자습하라고 했는데.......”

“그게 그거 아냐?”

“좀 의미가 다르지.”

“아, 몰라. 머리 아파.”

“근데 왜 그랬어? 조용히 처분을 기다려도 됐잖아?”

“주산 저 인간 이런 거 한번 뺏어 가면 언제 줄지 몰라. 이 책 오늘까지 안 갖다 주면 연체 붙는단 말이야.”

“연체?”

혜란은 정아가 선생의 부당한 처사에 반발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니 황당해서 픽, 웃음이 났다.

“어, 그거 비웃음이지?”

“아니. 너처럼 선생이랑 맞장 뜨는 특이한 애는 첨이라 너무 놀라워서.”

“너도 엄청 특이하거든?”

“내가?”

“그럼! 너같이 죽어라 책만 보는 애가 어디 흔한 줄 아니? 난 돈 줘도 못한다. 물론 그래서 내가 너한테 끌리긴 했지만.”

순간, 혜란은 그때까지도 조금은 남아 있던 정아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느꼈다. 정아는 기다려 줘서 고맙다며 혜란을 떡볶이 집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서로 집이 같은 방향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와, 난 세 정거장인데도 버스 타고 다니는데, 넌 나보다 배는 더 멀면서 걸어 다닌단 말이야? 대단하다.”

그 날 이후 정아와 혜란은 하굣길 단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