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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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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퇴 후


BY 하윤 2013-05-23

혜란은 학교를 그만둔 지 5일 만에 직물 공장에 들어갔다.

이집 저집 다니며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동네 아줌마가 혜란이 자퇴했다는 소식은 또 언제 들었는지 일자리를 물고 찾아왔던 것이다. 혜란은 엄마가 어느 틈에 직장을 좀 알아봐 달라고 손을 써 놓았음을 눈치 챘다. 그래서 기숙사가 딸린 공장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당장이라도 가겠다고 나섰다. 큰오빠가 집에서 놀고먹을 때 당하던 구박을 익히 보아 왔던 터라 혜란은 단 하루도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공장의 작업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혜란은 자신의 결정이 너무 성급하고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가장 먼저 혜란의 혼을 쏙 빼놓은 것은 지축을 울리는 듯한 베틀 소리였다. 베틀 한 대가 철컥철컥 규칙적으로 내뿜는 소리만도 엄청난데 그게 수십 대나 모여 있었으니, 귀가 아픈 혜란에게는 최악의 작업 환경이었다. 서너 명씩 조를 짜서 일하는 구조였는데, 혜란이 같은 초짜를 받으면 아무래도 생산량에 차질이 생기니까, 다들 자기 조에 받는 걸 꺼렸다. 혜란 자신도 썩 내키지 않는 데다 처음부터 천덕구니 취급까지 당하니까 더 기분이 안 좋았다. 결국 혜란은 최고참 조장한테 떠맡겨졌다. 최고참 조장은 혜란의 귀에다 소리를 꽥꽥 질러가며 일을 가르쳤다.

소음에 이어 두 번째로 혜란을 경악케 한 것은 ‘곱빼기’라는 근무 형태였다. 베틀은 일 년에 두 번, 추석과 설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안 돌아가는 날이 없다고 했다. 공원들은 주야 12시간씩 2교대로 일했고, 일요일은 격주로 쉬었는데, 그 중 쉬지 않는 날의 24시간 근무를 ‘곱빼기’라고 했다. 말 그대로 24시간 동안 일을 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잔혹한 스케줄이었다.

처음 곱빼기를 하던 날, 혜란은 잔뜩 긴장한 채 현장에 들어갔다. 처음 12시간은 평소처럼 낮 근무 하듯이 쉽게 했다. 하지만 퇴근해야 할 시각에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을 때부터는 급격하게 의욕이 떨어졌다. 지금 저녁을 먹고 잠을 자러 가는 게 아니라 밤을 꼴딱 새며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인데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혜란은 일단 자정만 넘기고 보자는 심정으로 버텼다. 그 다음은 남들 다 자는 새벽에 깨어 있다는 야릇한 자부심과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으로 한 시간 한 시간 견뎌 나갔다.

고비는 새벽 4시 이후에 찾아왔다. 혜란은 저도 모르게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면서 비몽사몽이 되어 갔다. 그 시끄러운 베틀 소리도 조장 언니의 고함도 모두 자장가로만 들렸다. 눈꺼풀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걸 그때 알았다. 깜박 졸다가 흠칫 깨어날 때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것처럼 정신이 아득하고 섬뜩했다. 자기가 지금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한탄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죽어도 좋으니 자고 싶기만 했다.

아침 8시에 시작한 곱빼기는 다음날 아침 8시에야 끝이 났다. 꼭 죽을 것 같았는데 안 죽고 아침 해를 다시 보니 감개무량했다. 숙소로 돌아온 혜란은 그대로 쓰러졌다. 언니들이 밥 먹고 자라고, 아니면 허기져서 못 잔다고 흔들었지만, 혜란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같이 24시간을 일한 다른 언니들은 생생했다. 심지어는 머리감고 화장하고 외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곱빼기 끝나면 그날 저녁부터 야간 근무를 들어가게 돼 있었다. 낮에 잠만 자도 모자랄 판에 외출이라니! 아무리 일이 몸에 익었다는 걸 감안해도 혜란으로선 이해 불가의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먹고 자고 일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고, 주간에서 야간으로 야간에서 주간으로 근무 시간이 바뀔 때마다 한 주가 휙휙 사라졌다. 흐르는 시간은 아까웠지만 일과표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공장 생활이 속 편하긴 했다. 무엇보다 집과 학교 양쪽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안 받아서 좋았다. 혜란은 거기 꼼짝 않고 틀어박혀서 돈만 벌어야겠다는 결심을 매 순간 다졌다.

그런데 한번은 일을 끝내고 마당을 가로질러 숙소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늦가을이라 낙엽이 마구 흩날리고 있었다. 혜란은 느닷없이 집에 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집 생각이 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혜란은 스산한 바람에 잠시 마음이 흔들린 것뿐이라고 일축해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감정은 덩치를 키워 나갔다. 감상에 빠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너무 단속한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하루에 단 30분 만이라도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는 등의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서 대여섯 명이 함께 부대껴야 하는 상황에선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감정적인 문제 외에 더 큰 괴로움은 따로 있었다. 바로 소음이었다. 대가 센 언니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나 곱빼기 같은 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었으나, 소음으로 나중에 얻을 거라곤 ‘난청’밖에 없어 보였다. 이미 한쪽 귀가 망가진 마당에 나머지 귀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혜란은 소음이 적은 직장으로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계획을 세운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버티는 데는 큰 힘이 되었다.

 

그런 어느 날 밤, 상상도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설도 추석도 아닌데 베틀 소리가 딱 멈춰 버린 것이었다. 공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적막감에 휩싸였다. 베틀이 몽땅 멈춘 광경은 처음 보는지라 혜란의 눈에는 그곳이 딴 세상 같았다. 전원 스위치를 내린 공장장은 어리둥절해 하는 공원들에게 공장이 부도났으며, 사장은 행방을 감추었다고 말했다. 그리곤 사장이 도망간 마당에 베틀을 계속 돌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일단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공원들의 분노가 여기저기서 폭발했다. 하지만 공장장마저 피해자이다 보니 사람들의 아우성은 공허하기만 했다. 우왕좌왕하는 공원들 틈에서 혜란은 눈만 멀뚱멀뚱 굴리고 있었다. 공장이 그토록 쉽게 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혜란은 당황했다. 기사나 직수들이 하나둘 그만두고, 지난달 월급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흉흉한 소문이 돌긴 했어도 혜란은 설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월급도 꼼짝없이 떼일 모양새였다. 월급이 몇 달치씩이나 밀린 이들 몇몇은, 밀린 걸 못 받을까 봐 다른 데로 가지도 못하고 죽지 못해 일해 온 결과가 결국 이거냐며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부짖었다. 날짜를 한 달도 못 채운 혜란은 찍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먹고 자고 했으니 아주 손해 본 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혜란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아침에 빨아 놓은 젖은 속옷은 그냥 비닐봉지에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칫솔을 찾아 챙기는데, 그제야 손이 막 떨려 왔다.

혜란은 그동안 자신을 책임졌던 조장한테 작별 인사를 한 다음 숙소를 나왔다. 지난 20여 일간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는 공장 대문을 통과하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공장 주변은 온통 논밭이라 사방이 깜깜한 데다 찬바람까지 불어 무섭고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들길에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등만 믿고 혜란은 억지로 발걸음을 뗐다. 가다 보니 자기처럼 일찌감치 마음을 접은 사람들이 하나둘 짝을 지어 가고 있었다. 혜란은 유령처럼 그들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