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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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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BY 하윤 2013-05-22

다음날은 등교하자마자 서무실에 불려갔다.

서무 직원은 이번 토요일까지가 최종 시한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혜란은 이미 자신의 문제가 임 선생의 손을 떠났음을 깨달았다. 혜란은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정이는 하루 반짝 맑았다가 다시 흐려진 혜란에게 걱정스런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혜란은 모른 척했다. 모든 게 다 지겹고 귀찮고 싫었다.

방과 후에 임 선생이 혜란을 불렀다.

“미선이 일은 잘 안 됐다며? 유감이다.”

혜란은 괜찮다는 듯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던?”

“그만두래요.”

혜란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내뱉어 버렸다. 아버지는 진작부터 때려 치라고 했답니다, 그 말까지 덧붙이고 싶었다. 근데 참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하는 순간 임 선생과 자신 사이에 연결돼 있던 가느다란 실이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임 선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자 혜란은 그 침묵조차 어색해졌다. 문득, 더는 용건도 없는데 자기가 계속 서 있으면 임 선생이 불편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란은 그만 나가 보겠다는 뜻으로 허리를 굽혔다. 임 선생은 조용히 팔을 내밀어 혜란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고도 임 선생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했다.

“네가 사회에 나가 보면 알게 되겠지만, 학교는 끝까지 마치는 게 좋아. 야간부로 옮기는 방법도 있으니까 우리 좀 더 생각해 보자.......”

혜란은 야간부 얘기에 잠시 귀가 솔깃해졌다. 하지만 그것 역시 당장 밀린 공납금부터 내야 논의가 가능하다는 말에 혜란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지 말고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부모님과 잘 상의해 보렴.”

임 선생은 간곡하게 말했다. 의논할 사람이 없다고, 자기한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임 선생한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혜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혜란의 침묵이 길어지자 임 선생도 더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쨌든, 토요일까지는 학교에 나와라.......”

 

이미 결론이 난 마당에 시간을 끈다는 건 가혹한 일이었다. 그러나 혜란은 임 선생이 시키는 대로 했다. 임 선생은 그 며칠 동안에라도 혹시 무슨 변화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목요일과 금요일이 지나 드디어 마지막 등교일이 되었다. 토요일이라 교실은 다른 날보다 훨씬 에너지가 넘쳤다. 소정이는 아침부터 엄마에 대한 불만으로 볼이 부어 있었다.

“내가 지각한 건 순전히 우리 엄마 때문이야. 아니 한 번 깨우고 그걸로 땡 하면 어떡해? 일어날 때까지 확인 사살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오빠는 새벽같이 학교에 가는데도 척척 깨워 주고 온갖 수발 다 들어주면서 맨날 나만 찬밥 취급이야. 아들 딸 차별이 이렇게 심한 데는 우리 집밖에 없을 거야.......”

혜란은 주산 연습을 하는 척했기 때문에 소정이는 앞자리 아이들과 떠들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난 과일 주스 먹고 싶었는데, 만들 시간 없다면서 오빠 주려고 만든 토스트나 먹으라는 거야. 아니, 내가 뭐 남은 음식 처리하는 사람이야?”

혜란은 그날 아침까지도 소정이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소정이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푸념을 듣고 있으려니 그런 고민 자체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소정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소정이도 절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혜란은 일초라도 빨리 교실을 떠나고만 싶었다. 누적된 압박감과 긴장 탓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토요일 마지막 수업은 임 선생의 담당 과목인 국어였다. 임 선생은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했지만 어딘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게 자기 탓인 것 같아 혜란은 단 한 번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마침내 모든 수업이 끝났다. 아이들은 일찍 집에 갈 생각에 들떠 가방을 싸느라 정신없었다. 임 선생은 혜란에게 앞으로 잠깐 나오라고 했다.

“친구들한테 인사는 하고 가야지?”

임 선생은 맨 앞자리 아이도 못 들을 만큼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혜란은 고개를 저었다. 임 선생은 혜란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알았으니 그만 들어가라고 했다. 혜란은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임 선생의 나직한 한숨이 천둥처럼 귀를 때렸지만 혜란은 모른 척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임 선생은 종례도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나가 버렸다. 문을 열고 나갈 때 얼핏 본 임 선생의 표정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임 선생을 괴롭히는 것 같아 혜란은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이젠 다 끝났다.

혜란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벌써 가는 거야?”

가방을 싸다 말고 앞자리 아이들과 일요일에 어디로 놀러 갈까를 한창 의논 중이던 소정이가 물었다.

“응.”

혜란은 짧게 대답하고 뒷문으로 나왔다.

“혜란아.”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지 소정이가 뒤따라 나왔다. 혜란은 못 들은 척 잽싸게 계단을 내려가 운동장을 거쳐 교문까지 단숨에 걸어갔다. 소정이가 복도 창을 통해 계속 지켜볼 것 같았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학교를 나와서도 혜란은 뭔가에 쫓기듯 정신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G대까지 와서야 걸음이 멈췄다. 문득 지금이 G대를 구경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그곳을 지나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없던 용기가 덜컥 생긴 것이었다.

G대 교정은 온통 가을이었다. 특히 붉은 벽돌 건물을 뒤덮은 담쟁이가 아름다웠다. 학생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느긋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 사람도 하나의 풍경이 될 수 있다는 걸 거기서 처음 알았다. 혜란은 가만히 벤치에 앉아 눈앞의 풍경들을 감상했다. 소정이는 G대에 놀러 가자는 소리를 자주 했었다. 그런데 결국 한 번도 같이 와 보지 못했다는 게 새삼 마음 아팠다.

 

집에 오니 뜻밖에도 엄마가 돌아와 있었다.

미리 짠 것처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집 나간 지 8일만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그동안 묵은 먼지들을 닦아내고 있다가 혜란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퍼부어 댔다.

“말만 한 가시나가 있다는 집의 부엌 꼴이 이게 뭐냐? 옛날 같으면 시집가서 애를 낳아도 낳았을 년이. 이리 더럽게 해 놓고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매운 엄마의 잔소리도 그때만큼은 반가웠다. 엉망진창이었던 집이 엄마의 야무진 손끝 아래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엄마가 차린 저녁밥상 앞에 세 식구가 모여 앉았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힘겹게 되찾은 평범한 일상에 다들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질서와 정리정돈만큼 아름다운 게 또 있을까. 다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는데 혜란 자신만 원래 자리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이 좀 씁쓸했다.

설거지를 하면서 혜란은 엄마한테 오늘 학교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너희 아버지한테 얘기 다 들었다. 선생이 일자리를 소개해 줬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그게 뭐냔 말이다? 바람만 잔뜩 넣어 놓고 나 몰라라 하다니. 그리고 너 하나 공납금 안 낸다고 학교가 망하기라도 한다던? 세상인심 참말로 무섭다.”

엄마는 생뚱맞게도 임 선생과 학교를 맹렬히 비난했다. 일이 그리 돼서 안 됐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은 물론 기대도 안 했지만, 그렇게까지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다. 그 바람에 엄마 얼굴을 본 지 단 몇 시간 만에 반가웠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