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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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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BY 하윤 2013-05-21

월요일 아침, 혜란은 곧장 교무실로 불려갔다.

“주말은 잘 보냈니?”

임 선생은 잔잔한 미소로 혜란을 맞았다. 확실히 임 선생은 지금껏 겪어 왔던 다른 선생들과는 달랐다. 일이 이 정도 되면 끝까지 좋은 낯을 보이기가 싶지 않는데, 임 선생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았다. 한 번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끔찍한 주말이었어요, 선생님.’ 혜란은 속으로만 대답했다.

“어떻게, 부모님과 상의는 해 봤니?”

혜란은 늘 그랬듯이 묵묵부답으로 서 있기만 했다.

“결국 등교 정지 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거니?”

혜란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에 다 내기가 힘들면 분납도 가능하긴 한데. 일단 이번 주 안에 반이라도 내면 등교 정지까지는 안 당할 텐데.......”

혜란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임 선생은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

“설마, 그만둘 결심을 이미 굳힌 건 아니지?”

혜란은 더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임 선생은 답답해서 더는 대화를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혜란은 그 자리를 물러나야 할지 계속 서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어 당황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임 선생은 뭔가가 떠오른 듯 다시 혜란을 바라보았다.

“혜란아, 알바라도 좀 해 볼래?”

혜란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

“무역과 이반에 정 미선이란 애가 있는데, 걔도 형편이 어려워서 제 담임이 소개해 준 양말 공장에 다닌다더라. 가서 너도 일 좀 할 수 없는지 한번 물어나 보렴.”

혜란은 당장 무역 2반으로 달려갔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심정이었다.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미선이는 순식간에 혜란의 목숨 줄을 쥔 구세주로 등극했다. 미선이를 좀 불러 달라고 부탁하고 복도에서 기다리려니 짧은 순간인데도 몹시 긴장이 되었다. 곧 피부가 까맣고 키가 작은 한 아이가 밖으로 나왔다. 혜란은 자신의 큰 키가 혹시 미선이의 기분을 거슬리게 하지는 않을까 싶어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미선이는 경계하는 눈초리로 혜란을 쏘아보았다. 혜란은 공손하게 용건을 말했다.

“저기, 난 상과 서 혜란인데, 우리 선생님 소개로 왔어. 네가 일하는 데서 나도 일 좀 할 수 없을까?”

“아이 씨팔, 내가 무슨 직업소개손 줄 아나?”

혜란은 대뜸 욕부터 날리는 미선이에게 놀랐지만 모른 척했다. 미선이는 운동화 앞코로 바닥만 툭툭 찰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란은 선생의 처분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얌전하게 기다렸다. 얼마 후 1교시 수업을 알리는 예비 종이 울렸다. 미선이는 “알았어. 일단 사장한테 말은 해 볼게.” 하고는 교실로 쑥 들어가 버렸다. 혜란은 미선이의 등에다 고맙다고 말했다. 미선이의 무례한 태도 따위는 상관없었다. 모든 걸 포기한 시점에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생겼다는 것, 그게 중요했다.

아버지는 그 얘기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조만간 돈이 들어오는 대로 공납금 반액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해 주었다. 혜란이 공장에 출퇴근을 하게 될 경우 교통비가 많이 들 거라고 걱정하자 아버지는 미리 한 달 치 토큰을 사 두면 된다고까지 말해 주었다. 매사에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던 아버지가 혜란의 얘기를 들어주고 해결책까지 제시해 준 건 정말 뜻밖이었다. 솔직히 학교 때려 치라고 소리칠 땐 언제고 돈을 벌게 됐다니까 저렇게 좋아할까 싶었지만, 그래도 모처럼 아버지가 웃는 걸 보니 등교 정지의 고비를 넘기게 됐다는 사실보다 혜란은 그게 더 뿌듯했다.

 

다음날 혜란은 가뿐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희망이 생기니까 세상이 달라 보였다. 모처럼 혜란이의 표정이 밝아지니까 소정이도 신이 났다. 기분이 안 좋을 땐 짜증스럽기만 하던 소정이의 수다가 마음을 달리 먹으니 명랑한 새소리처럼 들렸다. 자신과는 상관없을 것 같아 등한시했던 합창 연습도 입을 크게 벌려 적극적으로 했다.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다였다.

“우리 사장이, 더 이상 알바는 안 쓴대.”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미선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싼 맛에 학생을 썼지만 경기가 안 좋아져서 있는 사람도 내보낼 지경이라고 했다.

“나도 언제 잘릴지 몰라.......”

미선이는 시무룩하게 한 마디 하고는 교실로 들어갔다. 미선이가 왜 자신을 경계했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사장한테 말이라도 해 준 미선이가 고마웠다. 허나, 미선이는 미선이고 문제는 혜란 자신이었다. 7교시 끝나는 종이 울릴 때만 해도 얼마나 마음이 설렜던가. 미선이의 교실에 올 때까지만 해도 얼마나 가슴이 떨렸던가. 그런데 단 몇 초 만에 모든 게 끝나 버렸다. 세상은 다시 암흑천지가 돼 버린 것이다.

혜란은 방정맞은 자기의 입부터 저주했다. 어쩌자고 확실하지도 않은 일을 덜컥 아버지한테 털어놓기부터 한 것일까! 엄마가 나간 이후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초췌해져 갔다. 죽이고 싶도록 미운 아버지였지만 막상 기가 꺾여 후줄근해진 모습을 보니 혜란의 마음도 안 좋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아버지를 기쁘게 해 주고 싶은 생각에 그만 말이 앞서 나간 것이었다. 어제와 정반대의 소식을 아버지한테 전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너무 아파 왔다. 장작을 패듯 머리가 두 쪽으로 쫙 갈라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어디 나가지도 않은 채 혜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니? 내일부터라도 나오라고 하던?”

“아직, 잘 모르겠어요.......”

혜란은 기대에 부푼 아버지를 실망시키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 안 고프냐? 국수 삶아 먹자.”

아버지는 부엌으로 들어가 손수 냄비를 들고 나왔다. 혜란은 얼른 아버지 손에서 냄비를 빼앗아 수돗물을 받았다.

“왜? 내가 해 줄게.”

“제가 할게요.”

혜란은 석유곤로의 불을 켜고 냄비를 올렸다. 아버지는 방으로 가지 않고 찬장에서 국수를 꺼냈다. 졸지에 혜란은 아버지와 나란히 불 앞에 서서 물이 끓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어제는 황송했던 아버지의 자상함이 오늘은 섬뜩했다. 사실을 알면 태도가 돌변할 걸 상상하니 그 상태로는 일초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혜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버지.......” 하고 불렀다.

“응?”

“실은 그 회사에서 더 이상 사람을 구하지 않는대요.......”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걸 왜 이제 말하니?”

아버지는 국수를 툭,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혜란은 할 일이 오직 그것뿐인 듯 냄비에서 김이 나기만 기다렸다. 잠시 후 아버지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국수는요?”

“너나 실컷 처먹어라!”

아버지는 와락 성을 내고는 휙 나가 버렸다. 숨이 턱 막혔다. 충분히 각오했다고 해서 고통이 덜한 건 아니었다. 가슴이 저려 왔다. 미선이에게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충격적이고 더 절망적이었다. 혜란은 일단 물이 끓기 시작하는 냄비를 내렸다. 그런 다음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동시에 만성 중이염을 앓고 있는 혜란의 오른쪽 귀도 미칠 듯이 욱신거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발에서 쥐가 났다. 혜란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작은방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엉덩이가 저려 올 때까지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