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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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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BY 하윤 2013-05-20

그즈음 학교에서는 교내 합창 대회를 앞두고 각 반마다 노래 연습이 한창이었다.

그런데 음악 선생이 너무 편파적이고 변덕이 심하다는 게 문제였다. 한 마디로 자기 기분에만 충실한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좀 떠든다거나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면 그대로 피아노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리기가 예사였다. 그래서 합창 연습이 있는 날은 음악실에 가기 전에 실장이 미리, 제발 음악 선생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자고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하지만 교실에 날아든 파리 한 마리 갖고도 부르르 폭발해 버리는 사람의 비위를 맞춘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어느 날, 그날도 음악 선생은 발끈해서 나가 버리고 실장의 어설픈 지휘 아래 혜란네 반 아이들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음악실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웬 여자가 들어왔다. 앳된 인상의 그 여자는 눈이 동그래진 학생들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작년에 이 학교를 졸업한 여러분들의 선배예요. 지금 G대 작곡과 일학년이고요. 음악 선생님을 뵈러 왔다가 밖에서 여러분이 연습하는 걸 좀 지켜봤어요. 괜찮다면 내가 좀 도와줘도 될까요?”

당연히 박수가 쏟아졌다. 선배는 한 소절 한 소절 쉽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대놓고 학생들을 무시하던 음악 선생과는 차원이 다른 지도였다. 혜란은 그 선배를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G대는 S여상과 혜란이네 동네의 딱 중간쯤에 있어 항상 등하굣길에 지나다니는 곳이었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학교 건물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교정은 이국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막연한 동경과 부러움을 가졌었는데, S여상 선배가 거기 학생이라니 놀랍고도 반가웠다. 더구나 한 해 재수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학에 들어갔다니, 정말 대단했다.

“여기 교생 실습을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학교 졸업생들이에요. 선생님들 중에도 우리 학교 출신 선배들이 많다는 건 다들 알고 있죠? 여러분들도 각자의 꿈을 하나 정해서 꼭 이루어 나가기 바랍니다.”

수업을 마치고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선배가 한 말이었다. 불과 세 살 차이밖에 안 나는 선배의 당당한 모습에 혜란은 저절로 기가 죽었다. 소정이도 같은 심정이었던지 교실로 돌아가는 내내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아까 그 선배, 정말 멋있더라. 아, 취업이나 급수 고민 같은 거 안 하고 오로지 대학 공부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대입 시험이 더 피 마르겠지. 네 오빠를 보면 알잖아?”

“우리 오빠는 아빠 땜에 목표가 큰 거고, 난 욕심 없어. G대 정도면 딱 좋아, 내 실력으로 갈 자신도 있고. 혜란이 넌 대학 안 가고 싶어?”

“나? 난, 고등학교라도 무사히 졸업하고 싶다.”

“뭐?”

소정이는 말도 안 된다며 깔깔댔지만 혜란으로선 진심으로 절박한 소원이었다. 임 선생은 개학 이후 거의 매일 혜란을 호출했다. 종례 후 교무실에 들렀다 집에 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상황이 아니어서 혜란은 곤혹스럽기만 했다. 잔뜩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조마조마한 나날이 이어졌다.

 

급기야 아버지 입에선 어차피 끝까지 못 다닐 거, 일찌감치 때려 치라는 소리가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1학기 때만 해도 그런 소리를 노골적으로 하지는 않았고,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보려고 시늉은 했는데, 이젠 완전히 손을 놓아 버린 것이다. 아버지가 포기한 이상 혜란도 더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10월의 세 번째 주말에 임 선생으로부터 최종 시한을 통보받았다. 다음 일주일 안에 돈을 내지 않으면 등교 정지를 당할 거라고 했다. 예상했던 일이라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다만 소정이와 헤어져야 된다는 것과 그렇게 되면 정우오빠와의 인연도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고 두려웠다.

소정이는 토요일이니까 시내에 구경이라도 가자고 했다. 혜란은 집에 일이 있다며 거절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과연 일이 있긴 있었다. 엄마의 비명이 골목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들어가 보니 엄마는 방 한구석에 몰린 채 아버지한테 한창 얻어맞는 중이었다. 혜란을 본 엄마는 살려 달라고 악을 썼다. 혜란은 당장 가방을 내던지고 방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고 눈은 이상한 빛까지 내뿜고 있었다.

혜란은 온몸을 던져 아버지를 말렸다. 벽에 부딪히고 바닥에 나가떨어지고 머리채를 쥐어뜯기고 주먹으로 얻어맞으면서도 몸을 사릴 순 없었다. 거기서 더 맞으면 엄마는 정말 죽거나 불구가 될지도 몰랐다.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엄마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며 문지방을 넘었다. 엄마가 신발을 챙겨 신을 수 있도록 혜란은 더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막았다. 엄마가 달아나자 아버지의 광기는 극에 달했다. 결국 혜란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때릴 대상이 없어지자 아버지는 살림살이를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에 이웃 사람들이 하나둘 혜란네 집을 기웃거렸다. 혜란은 옆집 장독대 뒤에 쪼그리고 앉아 귀를 막았다. 물건 부술 때 안 말리고 뭐했냐고, 나중에 엄마가 혜란을 닦달할 게 분명했지만 사지로 다시 들어갈 순 없었다. 정신없이 덤빌 때는 몰랐는데 온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욱신거렸다. 혜란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가을 하늘이 무심히 펼쳐져 있었다. 하도 면역이 돼서 더는 분할 것도 억울할 것도 서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좋은 계절에 왜 자기만 이 꼴인가 싶어 혜란은 너무 허탈했다.

잠시 후 밖이 잠잠해져서 살짝 내다보니 집을 나와 가게 쪽으로 사라지는 아버지가 보였다. 또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이다. 술 처먹다 뒈져 버려라, 혜란은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빌며 살금살금 집으로 들어갔다. 만신창이가 된 집은 고요했다. 한창 난리를 칠 때보다도 그런 순간이 혜란은 더 소름 끼쳤다. 상황이 아직 종료된 게 아니므로, 더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올 터이므로.

우두커니 서 있던 혜란은 청소를 시작했다. 정말로 하기 싫었지만 안 할 수도 없었다. 깨진 그릇들은 쓸어 담고, 다리 하나가 부러진 상은 접어 세우고,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물건들은 다시 제 자리에 놓았다. 그러는 중에도 아버지가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문 쪽을 힐끔거리며 가슴을 졸였다. 마지막으로 걸레를 빨려고 수돗가에 앉았는데 소금물에 절여 놓은 배추가 눈에 띄었다. 엄마는 김치 담글 준비를 하다 아버지한테 당한 것이었다. 혜란은 배추를 물에 씻어 소쿠리에 건졌다.

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점심을 거른 채 저녁을 맞이했으니 배가 고픈 건 당연했다. 밥통을 열어 보니 말라붙은 밥이 반 공기 정도 있었다. 거기에 물을 부어 최후의 한 톨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혜란은 밥을 좀 해 두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이 밤에 먹을 사람도 없는데 괜히 밥을 해서 찬밥을 만들었냐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고, 저녁 굶은 거 뻔히 알면서 여태 밥도 안 했냐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혜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신의 신세가 정말 지겨웠다.

엄마는 다음날 아침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 들어왔는지 아버지만 이불도 안 덮은 채 자고 있었다. 물기가 다 빠져 말라가는 배추부터 일단 어떻게 해야 했다. 부엌을 뒤져보니 다행히 엄마가 미리 준비해 둔 양념이 있었다. 혜란은 고무장갑을 끼고 배추에다 양념을 발랐다. 부엌 바닥이며 그릇들이 죄다 벌건 양념으로 범벅이 되었다. 짜증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저녁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더니 또 다시 술에 만취해 돌아왔다.

악몽 같은 주말이 느릿느릿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