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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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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BY 하윤 2013-05-19

8월 26일, 지겨운 방학도 드디어 끝이 났다. 정우오빠를 만난 것 말고는 전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방학이었다. 혜란은 조심스럽게 그림을 챙겨 학교로 갔다.

영화를 보고 온 다음날부터 혜란은 오드리 헵번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영화에 빵까지 얻어먹었으니 무언가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지만, 실은 정우오빠에게 뭐라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전에 정우오빠한테서 얻은 오드리 헵번 브로마이드를 바닥에 펼쳐 놓고 매일 조금씩 그렸다. 지우개질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도화지가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

“어, 오드리 헵번이잖아? 와! 이거 진짜 나 주는 거야?”

소정이는 그림을 받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곤 이 아이 저 아이한테 그림을 보여 주며 혜란이의 그림 실력을 칭찬했다. 졸지에 반 전체의 주목을 받게 되었으나, 원래의 목적이 틀어져 버린 혜란은 속이 타들어갔다. 결국 혜란은 정우오빠한테 전해 달라는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정우오빠가 우연히 그 그림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임 선생은 2학기에도 자리 변동은 없을 거라고 했다. 다른 반들은 매주 혹은 매월 자리를 바꾸었지만, 임 선생은 한 번 사귄 친구와 쭉 가는 것이 학교생활에 더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소정이는 혜란의 손을 덥석 잡으며 기뻐했다. 2학기에도 소정이의 짝꿍이라는 지위를 계속 유지하게 된 것은 정말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런데 그 행운을 오래 누리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또한 구체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3기분 고지서가 진작 나왔는데도 혜란은 아직 방학 전에 냈어야 할 2기분도 못 낸 상태였다. 임 선생은 개학 첫날부터 혜란을 부르긴 했지만, 더는 할 말도 없다는 듯 무거운 한숨만 내쉬었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봐....... 임 선생은 매번 완곡한 당부를 했지만 혜란은 집에만 오면 입을 다물었다. 돈 얘기를 꺼내 봤자 본전도 못 건지고 집안에 분란만 커진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왔더니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피범벅을 한 채 방에 널브러져 있고, 엄마는 다급하게 낡은 러닝셔츠를 찢고 있었다.

“누가 알려 줘서 나가 봤더니 골목에 이 꼴로 엎어져 있지 뭐니? 한번 두고 봐라. 네 아버지는 틀림없이 술 때문에 뒈질 거다. 혀가 꼬부라지고 정신이 없으니 어디서 누구한테 얻어맞았는지 알 수가 있나? 겨울이고 밤이었으면 벌써 얼어 죽었을 거다........”

엄마는 찢은 천으로 아버지의 팔을 동여매며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피는 순식간에 하얀 천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대로 멎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하이고, 이대로 있으면 큰일 나겠다. 이봐요, 혜란이 아버지, 정신 좀 차려 봐요. 빨리 병원에라도 가 봅시다.”

“이 씨팔! 그냥 냅둬! 이대로 있다 칵 뒈지면 된다. 내가 더 살면 뭐 하냐?”

아버지는 아파서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고집을 부렸다. 피는 계속 솟아났다. 아무리 봐도 꿰매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엄마와 혜란이 양쪽에서 아버지의 팔을 하나씩 붙잡고 집을 나섰다. 아버지는 쉴 새 없이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길 가던 사람들은 수시로 그들을 힐끗거렸다. 나무토막처럼 뻣뻣한 아버지와 씨름하느라 혜란의 몸은 금세 땀으로 젖어 버렸다. 마침내 시장통 입구에 있는 동네 의원에 다다르자, 혜란의 입에선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혜란은 병원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왜?” 엄마가 빽 소리를 질렀지만 혜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혜란을 노려보던 엄마는 “참 가지가지 한다!” 하고는 병원으로 들어갔다. 혜란은 그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보기가 싫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혜란이네 가족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그들의 시선을 맞받을 자신이 없었다. 의료보호수첩을 들고 가면 별로 환영을 못 받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난번에 받았던 모욕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때도 아버지가 술이 취하긴 했지만 어디를 다친 건 아니고 식중독 증상이 있어 갔는데, 텅 빈 대기실에서 한 마디 양해의 말도 듣지 못한 채 무려 40분 이상을 멍청히 기다려야 했다. 접수대에 앉아 수다만 떨던 간호사들은 다른 손님이 들어오자 그제야 업무를 재개했다. 어디 나갔나 싶었던 의사는 진료실 안에서 버젓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술만 취하면 세상에 거칠 게 없는 아버지도, 독설이 무기인 엄마도, 항의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얌전히 그들의 지시에 따랐다. 혜란이 역시 그 정도 차별은 감수해야 한다고 체념을 먼저 했지만, 나중에서야 서서히 분노가 밀려왔다.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에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혜란은 냉큼 가까운 처마 밑으로 몸을 피했다. 먹구름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사방이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이내 장대비가 쏟아졌다. 거센 빗발은 혜란이 서 있는 곳까지 튀었다. 순간,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하게 느껴지면서 미칠 듯이 정우오빠가 그리웠다.

그날 밤 혜란은 몰래 집에서 나와 소정이네 집까지 걸어갔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소정이네 집은 창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그 불빛 속에서 화목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소정이네 식구들을 상상하니, 모퉁이에 숨어 있는 자신의 처지가 더 비참하고 초라해 보였다. 그런데도 혹시나 정우오빠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선뜻 발길을 돌릴 수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정이네 집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골목에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을 때에야 혜란은 와락 정신을 차리고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요한 거리에 요란하게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가 더 무서워 계속 뛸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쿵쿵쿵 뛰는 심장 소리에 맞춰 경보 선수처럼 빨리빨리 걷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혜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돌아가는 내내 정우오빠와 함께 걸었던 순간순간이 떠올랐다. 집에 한 번 바래다주었다고 이 지경이 되다니,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