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정부가 자녀 1인당 출산 양육비 1억 원을 지급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1,644

1984년


BY 하윤 2013-05-13

 

그런 절망 속에서 희망을 준 건 소정이 뿐이었다.

소정이는 혜란의 수호천사 같았다. 맨 뒷자리라 칠판 글씨가 안 보이는 혜란을 위해 소정이는 자기만 알아보던 필체까지 바꾸었다. 글씨를 빨리 쓰는 습관을 고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매 시간 또박또박 필기를 해서 혜란에게 노트를 보여주었다. 사려 깊은 소정이는 잘 안 보이는데 왜 안경 도수를 높이지 않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혜란이 심심찮게 교무실로 불려 갔다 와도 자연스럽게 모른 체했다.

준비물 같은 걸 못 챙겨 왔을 땐 기꺼이 자기 걸 나눠 주거나 그게 안 되면 옆 반에서 빌려다 주기까지 했다. 점심을 자주 굶는 혜란을 위해 따로 간식을 준비해 와선 기분 나쁘지 않게 권하기도 했다. 수학 선생은 그날이 5일이면 5번, 15번, 25번, 순으로 불러내 문제를 풀게 했는데, 혜란의 번호에 해당되는 날짜가 되면 소정이는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미리 예상 문제를 풀어 주었다.

소정이는 독서가 취미라고 했다. 혜란이도 책 읽는 걸 좋아하지만 학교 도서관이 한창 내부 수리 중이어서 책을 빌릴 수가 없다고 하자, 소정이는 자기 집에 있는 걸 한 권씩 빌려 주었다. 소정이는 영화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때까지 혜란이 갖고 있던 영화에 관한 정보라곤 스치듯 보았던 텔레비전 영화 몇 편이 전부였다. 외화라면 질색을 하는 부모님 때문에 ‘주말의 명화’나 ‘명화 극장’을 보는 건 꿈도 못 꾼다고 했더니, 그때부터 소정이는 자기가 주말에 본 영화의 줄거리들을 꼬박꼬박 들려주었다. 덕분에 혜란은 월요일을 가장 기다리게 되었다. 소정이 입에서 아카데미상을 받은 작품이라느니 주연여우상을 받은 배우라느니 하는 얘기가 흘러나올 때면 혜란은 꿈을 꾸는 듯 황홀했다.

“넌 어떻게 그런 것들을 많이 아니?”

“우리 오빠가 완전 영화광이거든. 오빠가 매달 받아 보는 영화 잡지만 꾸준히 봐도 이 정도 수준은 금방 될 수 있어.”

“그 잡지 나도 보고 싶다.”

“우리 오빠 이번에 고삼 됐거든. 그래서 아버지가 그 잡지 보는 거 금지시켰어. 오빠 방에 있는 잡지며 자료들도 모두 없애라고 했으니까 어쩌면 그것들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한번 말해 볼게.”

“니네 오빠는 공부도 잘한다면서, 근데 왜 그런 걸 못하게 해?”

“아버지가 원하는 S대에 가려면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지 뭐.”

혜란은 소정이 오빠한테 호기심이 생겼다.

“니네 오빠는 배우 중에 누굴 좋아하니?”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

“왜 그 '로마의 휴일'에 나온 배우 있잖아? 난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더 좋지만.”

혜란은 오드리 헵번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지만 단번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차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소정이와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혜란의 마음은 점점 더 허전해졌던 것이다. 소정이는 혜란이한테만 잘해 주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그래서 소정이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들끓었다. 혜란이 자리는 조용한데 소정이 자리만 왁자지껄 정신이 없을 때면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이 실감났다. 혜란은 자신이 소정이의 짝이 된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짝이니까 친해진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소정이 곁에도 못 갔을 테니까. 그런 상상은 혜란을 더 움츠러들게 했다.

성격이나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공부에서도 소정이는 월등하게 앞섰다. 특히 상고생의 필수 과목인 주산 부기 타자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윤이 자르르 흐르는 새 수판에다 타자기 대여며 부기 학원에 이르기까지 집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소정이에 비하면 혜란은 상대도 될 수 없었다. 남이 쓰던 이 빠진 수판으로 몇 번이고 재탕해야 하는 문제집이나 풀고 있었으니. 소정이와 대등한 관계에서 우정을 쌓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커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