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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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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BY 하윤 2013-05-12

 

1984년 3월 2일, 혜란은 S여상에 입학했다.

교장은 T시에서 가장 취업이 잘 되는 학교에 입학한 걸 환영한다고 말했다. 신입생들은 상업과, 무역과, 회계과, 정보처리과로 각각 두 반씩 나뉘어졌다. 혜란은 상업과 1반이었다. 반 아이들은 모두 59명이었는데, 혜란은 58번이 되었다. 57번인 혜란의 짝꿍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안녕?”

“으응.......”

“난 소정이야. 한 소정. 넌?”

“서 혜란.......”

“혜란이? 이름 예쁘다. 앞으로 잘 부탁해.”

소정이는 이름도 얼굴도 다 예뻤다. 혜란이와 통성명을 끝낸 뒤 소정이는 앞자리 아이들한테도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소정이의 놀라운 친화력은 순식간에 입학 첫날의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날려 버렸다.

“와! 난 S여상이 이렇게 후질 줄은 몰랐어. 삼십 년 전통이라는데 건물은 백년도 더 된 것 같아. 거기다 선생들은 왜 죄다 노인네들이니?”

“사립이라 그런가 봐. 그래도 T시에 있는 상고 중 취업률은 최고래.”

“하긴 학교 건물이 뭐 중요해? 취업만 잘 되면 되지.”

“맞아. 교복 자유, 두발 자유, 거기다 실내화까지 안 신어도 된다니, 실속을 참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

“교장 선생님 훈화도 용건만 간단히 하는 것이 꽤나 실속 있던데?”

“우리도 이제 실업계형 인간으로 길들여지는 건가?”

거침없는 입담에 다들 한바탕 웃었다. 그때 불쑥 소정이는 인문계 타령을 했다.

“난 인문계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 땜에 여기 온 거야. 우리 아버지는 오빠밖에 모르거든. 오빠 대학 보내고 박사까지 만들려면 돈 많이 든다고.......”

S여상은 인문계보다 커트라인이 높았으므로 인문계 갈 성적이 안 돼서 이 학교에 온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가정 형편에 맞춰 실업계를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소정이가 툭 내뱉은 그런 말은 어찌 보면 금기 사항이었다. 해 봤자 속상하기만 하고 아무런 소득도 없는 넋두리일 뿐이니까. 그런데 소정이의 폭탄 발언은 계속되었다.

“난 나중에 내가 벌어서라도 꼭 대학에 갈 거야. 너희들도 대학 가고 싶지?”

“그렇기야 하지.......”

어느새 화제는 소정이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실은 자기도 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할 수 없이 여상에 왔다는 둥, 계집애가 무슨 공부냐는 할머니의 반대가 심해서 고등학교도 겨우 왔다는 둥, 앞자리 아이들이 각자의 사연들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혜란은 첨엔 소정이가 좀 푼수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소정이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에 매료되었다. 초면에 그토록 솔직한 대화를 이끌어내는 소정이의 능력에 감탄하며 혜란은 묵묵히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혜란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과묵하고 소심한 탓만은 아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혜란은 입학 여부 자체가 불투명했었다. 부모님은 입학금 고지서를 앞에 두고 한숨만 내쉴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았다. 우연히 집에 들른 작은아버지가 입학금을 내주지 않았다면 혜란은 지금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런 처지에 어떻게 인문계 실업계를 따지고 대학을 꿈꿀 수 있겠는가. 혜란은 일단 S여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였다. 그래서일까, 입학 첫날부터 혜란은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고 있었다.

 

입학하고 2주 만에 혜란은 교무실로 불려갔다.

“입학금 인상분을 아직 안 낸 사람은 전교에서 너 하나뿐이구나.”

담임인 임 선생은 차분하게 말했다.

“얼마 안 되니까 이번 주 안으로 내 주면 고맙겠다. 가능하지?”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혜란은 얼굴이 벌게졌다. 그 와중에도 전교에서 자기만 아직 안 냈다는 말이 정말인지가 궁금했다. 대체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S여상에 왔을 텐데, 다들 그렇게 돈을 척척 잘 냈다는 말인가. 임 선생을 의심할 마음은 없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돈 문제로 선생들의 독촉을 받는 데는 이력이 난 혜란이 보기에, ‘돈을 안 낸 건 너밖에 없다’는 협박은 선생들이 가장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그 외에도 선생들이 혜란을 다그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매일 아침 교무 회의 때마다 곤욕을 치러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하소연하는 선생이 있는가 하면, 점잖게 말하면서 은근히 모욕감을 주는 선생도 있고, 대놓고 짜증을 내며 윽박지르는 선생도 있었다. 하지만 이래도 저래도 달라질 건 없었다. 혜란이 돈을 못 내는 건, 선생들의 난처한 입장을 몰라서도 아니고, 자존심이 덜 상했다거나, 아직 견딜 만하다거나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3월 한 달은 가정 방문 기간이었다.

혜란은 가정 방문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자기 차례가 닥친 당일 아침에야 겨우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는 먹고 있던 밥숟가락을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문디 지랄! 가정 방문은 먼 얼어 죽을 가정 방문? 다 죽고 집구석에 아무도 없다고 해라!”

제발 엄마가 그냥 홧김에 한 말이기를, 혜란은 수업 시간 내내 빌고 또 빌었다. 단축 수업이 끝나자마자 혜란은 총알같이 집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엄마는 큰방에 누워 있었다. 허리가 안 좋은 엄마는 부업거리가 없을 때는 거의 누워 지냈다. 평소에는 보기 싫었던 그 모습이 그날은 그저 반갑기만 했다. 담임이 곧 올 거라고 하자 엄마는 기겁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이 가시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못 오게 하라고 했잖아? 귓구멍이 막혔냐?”

“선생님은 위가 안 좋아서 아무 음식이나 못 먹으니까, 괜히 이것저것 준비할 필요 없다고 했어요. 정 섭섭하면 블랙커피 반잔이면 된다고 했지만, 그마저도 몇 집 돌다 보면 배가 부를 테니 우리 집에선 아무 것도 내놓지 않아도 돼요. 제발 그냥 선생님을 만나기만 해 줘요.......”

혜란은 굳이 안 해도 될 말까지 구구절절 늘어놓으며 엄마한테 매달렸다. 하지만 엄마는 매몰차게 혜란의 손을 뿌리치고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혜란 자신도 엄마처럼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혜란은 일단 눈에 보이는 대로 집을 치웠다. 그런 다음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임 선생을 기다렸다. 죽음 같은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마침내 옆 동네에 사는 아이의 안내를 받으며 임 선생이 도착했다. 걸어오느라 숨이 찼던지 임 선생은 연신 숨을 몰아쉬었고, 제 할 일이 모두 끝난 아이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혜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 선생님....... 지금 집에 아무도 없어요.”

“괜찮아. 네가 있잖아?”

임 선생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조금 기운을 얻은 혜란은 집 안으로 임 선생을 안내했다. 혜란이네가 세 들어 사는 집은 주인집 옆에 창고처럼 들러붙은 방 두 개짜리 반지하였다. 폭이 일 미터가 채 안 되는 통로는 그날따라 더 어두컴컴했다. 임 선생은 조심조심 혜란을 따라왔다. 혜란은 큰방의 미닫이문을 열고 형광등을 켰다. 밝은 불빛 아래 누추한 방안 풍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차라리 어두운 게 나을 뻔했다.

혜란은 임 선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임 선생은 혜란의 손을 잡으며 다리 아프니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

“왜 이렇게 떠는 거야?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임 선생이 농담을 하며 긴장을 풀어 주려고 했지만 이미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 혜란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임 선생은 취미가 뭔지, 부모님은 어떤 분들인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따위를 부드럽게 물었지만 혜란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임 선생은 그런 혜란을 채근하지 않고 가만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혜란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은 다음 차례의 아이 집에 임 선생을 안내해 주고 난 뒤였다.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그러자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순간 그때까지 꾹꾹 누르고 있던 엄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혜란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아무 데나 쏘다녔다.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해가 다 지도록 돌아다녔지만 분노는 더더욱 커지기만 했다.

그날, 혜란은 앞으로의 학교생활이 순탄치 않을 거라는 걸 분명하게 예감했다. 애초에 부모님한테는 자신을 공부 시킬 의지가 전혀 없으며, 차라리 나가서 돈이나 벌어 왔으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건 다 형편이 쪼들리니까 그런 것이려니 하며 받아들였다. 하지만 돈이 안 드는 가정 방문에조차 엄마는 냉담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바람에 작은엄마 몰래 입학금을 내 준 작은아버지를 봐서라도 열심히 다녀 보겠다던 혜란의 각오는 와르르 무너졌다.